프리렌) 본 작품이 수명물 보단 성장물에 더 가까운 이유
본문
이 작품에선, 용사 일행의 행적만큼이나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은근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무엇이 사람을 어른으로 만드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일단 주인공 프리렌 일행을 한번 봐보자, 이 중에서 어른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
이제 막 사춘기를 지날 무렵의 십대 소년소녀들이 어른이라고 불리기엔 턱없이 부족할 것이고
아마 천년 이상의 긴 세월을 살아온 엘프, 프리렌이 인생의 대선배로써 ‘어른’ 이라는 호칭엔 가장 적합한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보다 보면 느껴지겠지만, 프리렌은 ‘어른스러움’ 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체형이 그냥 어린애 수준인 건 둘째치고,
페른이 없으면 오후까지 늦잠을 자는 건 일상다반사에, 은근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고, 오로지 자신이 관심 있는 것에만 몰두하는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어른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모두와의 모험도, 내 인생의 백분의 일에 조차 미치지 못하는 걸"
사실 프리렌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프리렌은 용사 일행으로써 모험을 떠나기 전까진, 그 기나긴 수명 때문에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는 것을 멀리했기 때문
그렇다보니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바꾸어 갈 수 있는 어른스러움이, 프리렌에 몸에 베일 기회는 없다시피 했을 것이다.
이는 물론 엘프 입장에선 정말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이 애완동물에게 너무 과한 정을 주지 않으려 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비유를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
물론 프리렌이 다른 인간들을 동물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고 있다는 말은 절대 아니지만, 프리렌의 입장에서 인간은, 찰나의 시간에 죽어버리고 마는 생물 중 하나일 터이니 실로 절묘한 비유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랬던 프리렌의 삶에도 큰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인간의 수명이 짧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좀 더 알아가 보려고 하지 않았던 걸까...?"
용사 힘멜의 죽음. 그 기나긴 삶에서 처음으로 겪어본 상실의 아픔에 프리렌은 뒤늦게 뼛속 깊히 후회하고 만다.
힘멜이라는 소중한 사람이 떠나갈 때까지, 왜 그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았던 것일까 하고.
그의 죽음에서 프리렌이 받은 충격은 곧 그녀가 인간에 대해 더 알아보려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본 작품의 이야기가 시작된 본질적인 시발점 이기도 하다.
그렇게 프리렌을 여행길을 떠나, 과거보다 훨씬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쌓아나가게 된다.
옛 동료를 다시 만나거나, 살면서 처음으로 제자를 들이고, 여행을 함께하는 등
한번은 제자인 페른이 프리렌의 시간 감각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자, 페른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려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과 인간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는 걸 인지하고, 배려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수천 년간 혼자만의 길을 길어왔던 프리렌이, 용사 힘멜의 사후에서야 천천히 타인을 배려하는 어른스러움을 익혀나가게 됐음을 시사한다.
위 장면은 이 작품의 주제이자, 필자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바를 직설적으로 이야기해 준다.
어른이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억누른 채 계속해서 타인을 배려해 온 하이터의 삶을, 그의 사후에도 앞으로 수천 년은 더 살아갈 ‘어른’ 인 프리렌이 칭찬해 주는 장면
과거 수명을 이유로 인간관계에 줄곧 선을 그어온, 그저 오래 산 ‘어린아이’ 에 불과했던 프리렌이라면 아마 저런 행동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재밌는 일이군... 그 백분의 일이, 널 바꾼 거다."
아이젠의 말처럼, 프리렌을 이렇게 바꾼 것은 그녀의 삶의 백분의 일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였다.
아마 작가는 이런 프리렌의 경험을 통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를 많이 먹고 오래 사는 것만이 아님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이 작품은 프리렌의 시간 감각을 반영하듯 작중 시간의 흐름도 확확 빠르게 지나가는 면모가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이 수명물의 색깔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종합해 봣을 때, 한 엘프가 수천년이 지나서야 다양한 인간관계를 접하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낸 ‘성장물’ 이 더 이 작품에 정체성에 잘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