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봉요원 60권 473화 노예와 창부 이야기
본문
유비군이 4군을 점령하려 한다. 그런데 이 작계에서 ‘계양’은 불명확한 변수다. 4군을 빠르게 점령해야 하는 이 때, 계양을 놔둔다면 저들이 지원군을 통해 유비를 물고 늘어질 것이고 이는 자연스레 손권군의 개입을 불러올 것이다.
그렇기에 유비는 4군을 확보할 때까지 계양을 붙들어 놓을 사람이 필요했고, 노예인 요원화(다른 페르소나는 조자룡)가 주인의 명에 응해 계양으로 떠난다.
사흘(3일)이면 충분하다며.
요원화는 인간이 아니라 노예다. 사람은 무언가를 팔아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지만, 노예는 주인을 위해 자기가 가진 유,무형의 소유물을 팔아재낀다. 노예는 주인의 짊을 짊어지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다. 노예들은 본인의 신세를 자각하면서도, 대업이 중요한 이 때, 어찌 사적인 정(情)을 운운하냐는 말로 애써 포장할 뿐이다.
그러니 요원화는 노예다. 일개 자객이다. 생의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물건을 좀 팔면서’ 목숨을 부지한 노예인 것이다.
제 아버지의 배를 채우기 위해, 목숨을 ‘팔아’ 피 묻은 만두를 얻었다.
주인인 사마의의 가업을 위해, 목숨을 ‘팔아’ 사람을 죽였다.
그러면서도 자객 신분을 가리는 위장용인 ‘만두가게’를 열었고, 겉으로는 만두를 팔았다.
부모가 지어준 성(姓)을 ‘팔아’ 상산 조(趙)씨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다.
허나 그런 ‘팔아넘김’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노예의 생존에 있어 ‘팔아넘김’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노예는 무언가를 팔지 않으면 난세를 살아 갈 수 없으므로.
요원화가 제 목숨을 팔지 않았더라면 굶주림을 과연 어떻게 해결했겠나? 번씨 부인이 방중술로 교태를 팔지 않았더라면 험난한 난세에 미혼모로 과연 어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결국 노예에게는 ‘팔아치운다는’ 선택지밖에 고를 수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번씨 부인은 과거 (여러 오해가 얽혀) 자신이 버림받았을 때, 요원화를 원망했었다. 그가 자신을, 나아가 자신의 번(樊)가문을 ‘팔아치웠다‘ 여기며.
요원화가 자신을 사람이 아니라 노예로 대했다 여기며. 자신을 그저 인생에 있어 스쳐 지나가는 길손, 임무를 위해 상대하는 요인(要人), 무수히 많은 잠자리 상대 중 하나로 여겼다 생각하면서.
요원화가 조화(趙火)로 번(樊)가문에 머물던 사흘간의 일이, 사람과 사람의 정(情)이 통한 것이 아니라 노예가 노예를 상대한 것인 줄로만 알고.
그래서 번부인은 요원화를 원망한다. 그 사흘마저도 자신을 사람 취급 해주지 않았기에.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다. 그는 그녀를 인생의 과객(過客)으로 대한 적 없었다. 첫 만남 이후로 단 한번도 그녀를 잊은 적 없었다. 매년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나무 아래서 인간성을 곱씹으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녀와 만난 이후로 단 한번도 ‘귀고리’를 빼놓지 않았다.
요원화에게, 번씨 부인과 만나고 헤어졌던 그 ‘사흘’은 노예의 것이 아니라, 한가닥 남은 그의자아, 인성(人性)이 시킨 일이었던 것이다.
번부인은 요원화의 말로 묵었던 원망을 푼다. 그녀와 그가 함께 했던 사흘은 노예가 사람으로 되돌아갔던 시간이었다. 그는 단 한 순간도 번부인을 노예로 대한 적 없었고, 사랑하는 정인으로서 대했었다.
그렇기에 서로의 인간성을 확인한 번부인은 말한다. 사흘로 충분했다고.
누군가 저들을 노예와 창부로 깔본들 어떠하리. 그 사흘만큼은, 오롯이 서로가 서로에게 인간이었던 시간이었기에.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로는 확인했던 그 순간이니까.
물론, 그럼에도 저 둘의 신세가 노예임은 변함없다.
결국 요원화는 과거의 ‘사흘’처럼, 이번의 ‘사흘’도 주인의 성취를 위해 행동하고 있고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던 번부인은, 그 최후마저도 노예처럼 ‘계양성’과 목숨을 맞바꾼다. 뚜쟁이 요원화가 주선하여, 창부인 번씨가 적절한 ‘성’ 하나 가격으로 팔려나가는 것이리.
하지만 번부인은 더 이상 개의치 않는다.
자신의 전부인 목숨을 팔아넘겨 혼백만 남았으니, 더 이상 노예로서의 짐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기에. 혼백만 남았지만 그녀는 인간으로 돌아왔고 홀가분하다. 그녀 곁에는 그녀처럼 제 전부를 팔아넘기고 노예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혼백들이 길동무를 해주고 있고.
마지막 순간에, 번부인은 남편에게 이야기한다. 팔라고. 당신이 노예의 짐을 내던지기란 불가능하니, 언젠가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올 날을 위해 부단히 팔라고 기원하는 것이다.
빛(亮)도 팔아버리고
썩어 문드러진 나라도 팔아버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썩은 몸뚱아리마저도 팔아버리고...
최후의 순간에, 혼백이라도 인간으로 남아 다시 마주하기를 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