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이 호노오 작가) 시마모토 카즈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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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만화가. 1961년 4월 26일 홋카이도 이케다출생. "불꽃의 만화가"라는 이명으로 통하기도 한다.
시마모토 카즈히코라는 이름은 사실 필명이며,본명은 데즈카 히데히코(手塚秀彦)이다.
만화가임에도 굳이 필명을 쓴 것은, 일본에서는 만화의 신이라고까지 불리우는 데즈카 오사무와 성이 겹치는데다
그에 더해 데즈카 오사무의 자녀(아들)인 데즈카 마코토와 동갑내기인 탓에 본명으로 활동하기 곤란했기 때문이다.
대중적으로는 《불꽃의 전학생》, 《호에로 펜》, 《아오이 호노오》가 유명하지만 시마모토가 가장 자신있다고 거론하는 작품은
《역경 나인》과 《초급! 기동무투전 G건담》이다.
평소의 언동이나 라디오를 진행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그 자신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가상의 만화가인) 호노오 모유루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대학교 동창이자 지인인 안노 히데아키나 오카다 토시오 같은 지인들 말로는 호노오 모유루랑 시마모토의 평소의 모습은 별 차이 없다고 하며 방송에서도 기분이 좀 고양되면 바로 호노오 모유루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걸 볼 수 있다.
후지타 카츠히로도 트위터에서 시마모토를 아예 호노오(ホノオ)라고 호칭해버리는 등 반쯤 공인이나 다름없는 분위기다.
여기에 시마모토 자신도 《아오이 호노오》에서 자신의 옛 에피소드를 모티브로 삼아 호노오 모유루의 대학 시절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서
팬덤 사이에서의 인식을 부채질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호노오는 약간 소심한 면이 있는 시마모토와 달리 할 말을 다 하고 질러버리는 타입이라서 성격에서 일부 차이가 있다.
실제로도 시마모토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을 들어보면 차분하면서 침착한 면도 있어서 호노오와 완전히 일치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래서인지 시마모토 자신도 호노오가 오너캐냐는 물음에는 부정을 표했으며 애당초 후기 만화 등에 등장하는 오너 캐릭터가 따로 있다.
비쩍 마른 채 가죽점퍼를 입고 선글라스와 빵모자를 쓴 디자인이며 이쪽이 시마모토의 평소 성격에 가깝다.
호노오는 단순한 오너 캐릭터라기보단 작가가 하고 싶은 마음 속의 말을 대신 해주는 아바타에 가깝다고 봐도 좋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만화, 애니메이션, 특촬물을 좋아했으며 자신이 좋아하던 작품은 전부 히트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처음 만화로 그린 건 가면라이더(초대)라고 한다.그러나 당시엔 나이가 크면 만화는 당연히 졸업하는 것이라 여겼고
시마모토도 만화를 멀리한 시기가 있었다. 이때 우주전함 야마토를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으며
"만화도 애니도 어린이만 보는 것이 아니다." 라는 깨달음을 얻어 그때부터 만화와 애니를 많이 보고 직접 그리며 연구했다고 한다.
오사카예술대학 출신. 군사학과로 유명한 꽤 좋은 대학 붙었는데오사카예대 학생들이 가면라이더 영화 찍는 걸 보고 "저런 걸 하는 학교에 다니면 하루 종일 내가 좋아하는 걸 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해서 당시로선 그다지 명성이 없던오사카 예대에 진학한다.
"재학 중 데뷔하고 중퇴해서 전설이 되겠다." 라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그것을 이루어내 학교에선 유명했다고 한다.
대학 재학 중에는 데즈카 오사무, 마츠모토 레이지처럼 만화와 애니를 둘 다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애니메이터쪽에 더 관심이 있었으나 같은 과 동기 안노 히데아키의 실력에 절망하고,
시마모토가 대학 과제로 만든 애니메이션 "미래로의 사자"가 처참한 반응을 얻어 애니메이션은 접고 만화만 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뒤 데뷔에 성공했다.
쇼가쿠칸에서 데뷔했는데 원래는 슈에이샤쪽에서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쪽 편집자와 싸워서 쇼가쿠칸에 보냈다고 한다. 쇼가쿠칸을 선택한 이유는 다른 잡지에 비해 신인 만화가 상금이 쪼잔하고 적으니(슈에이샤나 코단샤는 100만엔에 비해 쇼각칸는 반도 안되는 가격), 다른 잡지에 비해 쉽게 상을 딸꺼라 생각했다고. 데뷔 초기작은 카리야 테츠가 스토리를 담당하고 시마모토가 작화한 《바람의 전사 단》과 시마모토의 입상작이었던 단편 "필살의 전학생"을 장편으로 개작한 《불꽃전학생》. 두 작품 모두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
본인이 자학을 많이 하고 한국에서는 시마모토의 작품이 메이저의 영역까지 올라간 적이 없어서
이 작가 인기없던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 두 작품을 연재할 때는 분명 시대를 풍미했던 인기작가였다. 본인 말로는 데뷔 초에 운을 다 썼다고 한다.
쇼가쿠칸에서는 인생의 파트너 편집자 미카미 신이치(三上信一)를 만나게 되는데 그와 개인적으로도 친하고 신인 만화가를 키워주는 역할도 했다. 다만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쇼가쿠칸이 아닌 도쿠마 쇼텐, 타케쇼보쪽에서 활동하던 시기가 있다.
이후 2000년대에 미카미 신이치가 실권을 쥐면서 쇼가쿠칸으로 복귀. 이후로는 쇼가쿠칸의 터줏대감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특유의 작풍이 유행에서 빗나가면서 큰 고생을 했다. 아오야마 고쇼와 대담할 때 말하기를 진짜 "난 끝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90년대에는 주로 디자이너 및 다른 인기 작품의 코미컬라이즈 담당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선생님은 만화보다 본인이 더 재밌어요." 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모에요 펜》, 《호에로 펜》, 《아오이 호노오》를 연재해 인기를 얻고 자전적인 만화를 많이 그리는 작가가 되었다.
그림에서 뜨거운 열정, 에너지가 전해져서 열혈, 불꽃의 만화가로 불린다.
초기엔 이러한 화풍이 아니고 마츠모토 레이지나 아다치 미츠루 느낌도 나는 화풍이었는데 만화가 데뷔 초부터 점점 진화해 현재의 화풍이 되었다. 뜨거운 느낌을 잘 내줘서 디자이너로서 캐스팅되는 일도 많다. 다만 시마모토 본인은 "나의 본질은 열혈이 아니고 절규다." 라고 한다.
사실 작품의 시츄에이션을 보면 열혈과 그다지 관계가 없고 정신승리하려고 절규할 때가 많다.
개그인 듯한 진지한 만화와 진지한 듯한 개그만화 중에서 무엇을 그릴까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했고, 그 결과물이 지금의 모습이라고 한다.
진지하게 보이는 것도 대부분 개그를 의도한 것이다. 이것이 비슷하단 소리를 듣는 쿠루마다 마사미와 시마모토의 결정적인 차이.
개그를 할 때 패러디나 유행을 활용한 개그는 잘 안 하고 필력과 연출을 활용한 개그를 하는 스타일이라 조금 시대성을 탈 수는 있지만
세월이 지나서 봐도 이해하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 패러디도 많이 하지만 못 알아보면 안 웃긴 패러디는 잘 하지 않고 애초에 무엇의 패러디인지 알아보기 쉽지 않아서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작가 경력의 80%는 개그 작품이지만 스컬맨, 원더 비트, 배틀 필드 같은 진지한 작품도 했고 진지한 전개도 할 능력이 된다.
평생을 개그에 바쳤지만 진지한 SF로도 평가받고 싶다는 욕심이 늘 있다고 한다.
연설이나 설교를 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의 대사를 보고 자신의 인생이 바뀐 것처럼 이러한 메세지를 통해 독자의 인생이 바뀌었으면 한다고 한다. 주로 하는 이야기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역경을 받아들이고 즐겨라.",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노력은 무의미하지 않다." 이러다가 가끔 헛소리로 발전하기도 한다. 궤변을 연발해서 웃기는 캐릭터가 주인공이나 라이벌로 나올 때가 많다.
다른 사람들이 안 한 새로운 작품, 개그를 추구한다. 이유는 거장들과 똑같은 걸로 경쟁하면 비교되어서 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런 것 때문에 유행과 동떨어진 작품이 많으며 불꽃전학생을 제외하면 연재 당시엔 관심을 못 받고 나중에 재조명된 작품이 많다. 10년은 지나서 재평가된 작품도 있으며 심지어 30년 뒤에나 재조명되기도 한다. 다른 작가들이 시마모토의 만화를 따라해서 만들거나, 따라하진 않았지만 내용은 비슷한 작품이 몇십 년 뒤에 대히트하기도 한다. 너무 시대를 앞서나가는 작가일지도 모른다.
신인 시절엔 그림을 못 그린다고 자조했지만 노력으로 그림 실력이 크게 늘었다. 그리는 속도가 매우 빠르며 드로잉 실력이 뛰어나서 어지간한 건 안 보고 밑그림 없이 바로바로 그려낼 수 있을 정도이다. 다른 작가의 화풍을 복사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기 어렵다는 메카나 괴수도 그린다.
엄청난 속필로 유명하다. 초급 G건담은 한 달에 100페이지 넘게 연재하기도 했으며정기 연재가 있음에도 동인 행사에 50페이지에 달하는 동인지를 자주 투고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G건담과 동인지가 겹쳤을 땐 한 달에 300장 그렸다고 한다.물론 현재의 시마모토는 거의 연출만 하고 주연 캐릭터 및 중요한 장면 외엔 대부분 어시스턴트가 그리는 작업 방식이긴 하지만이것도 다 시마모토가 수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그리고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으면서 2010년대 후반부턴 대부분 본인이 직접 그리고 있다.
양면 페이지를 써서 큰 그림을 그려내는 것을 즐긴다. 만화가와 편집자 사이에선 날먹으로 통해서 2연속 양면 페이지는 금기시되는데 시마모토는 3연속 양면 페이지도 쓴 적이 있다. 본인 말로는 절대 날먹이 아니고 혼을 담으려고 그런다고 한다. 그리고 설마 다음 페이지도 양면은 아니겠지?! 하는 독자의 허를 찌르면 웃기지 않느냐고 한다. 그러한 연출 의도라고 해설한다.
하지만 자기 만화에서 "마감이 위험할 때는 양면 페이지를 쓰면 돼! 라고 자학한 적도 있다.
집중선 연출을 즐겨 쓰며 집중선을 스스로 치기도 한다. 집중선은 자신있다고 한다. 아예 집중선 담당 어시를 두기도 했다.
작가로서의 단점은 결말이 명확한 작품이 별로 없다. 대부분 우리들의 싸움은 이제부터다 식의 엔딩이 많다. 특유의 작풍과 어울려서 크게 욕은 안 먹지만 호불호를 탈 수도 있는 점이다. 그의 작품은 결말은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코미디라 생각하고 그때그때 즐기면서 보는 것이 좋다. 이런 성향은 그가 존경하는 작가들이 이런 결말을 좋아해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시마모토 또한 독자가 생각할 여지가 있는 열린 결말이 훌륭하다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작품에 미소녀는 많이 나오지만 어째 관계 진전이 안 될 때가 많아서 후지타 카츠히로는 "너 연애 못 그리냐!!" 라고 하기도 했다. 시마모토 말로는 젊은 시절 주변에 왠지 여자들은 많았지만 제대로된 연애는 못 해봐서 못 그리겠다고. 본인이 제대로 만화가가 되고자 학교에서 짝사랑 하던 여자들 다 포기하고 중퇴하고 상경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작품 중 일, 꿈을 위해서 여자 관계를 포기하는 걸 미덕으로 미화할 때가 많다.
자신의 만화가 애니메이션이 되는 것이 꿈이라는데 제대로 애니화된 작품은 없고 의외로 실사화된 작품이 더 히트했다.
만화보다 본인이 더 웃긴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방송인 활동도 한다.
한 번 재미로 단기 기획으로 라디오를 "시마모토 카즈히코의 망가틱하게 가자"를 했는데 너무나도 웃기다는 소리를 들어서 7년 가까이 하기도 했다.
본인 만화에 나오는 설교나 연설을 대본없이 애드립으로 몇 분 넘게 할 수 있는 수준이며,
본인 만화 같은 대사가 사생활에서도 줄줄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정말 웃긴 사람으로 불리며 업계의 마당발이다.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하냐는 질문에
"고등학교 때 연극부였고, 혼자 만화나 애니메이션 더빙을 하기도 했고, 여러 만화의 명대사를 반복해서 보면서 뇌에 새겨졌다." 라고 답변했다.
오카다 토시오 말로는 시마모토는 연기를 안 하고 일상 생활에서 말할 때도 마츠모토 레이지 만화 캐릭터처럼 말하는 녀석이라고.
이런 반면 의외로 소심한 면도 있어서 방송 출연했을 때 MC가 말할 기회를 안 주면 중간에 끼어들 틈을 못 참고
아무 말 못 하고 그냥 오는 일도 있다. 발언 기회를 줬더니 너무 길게 연설하다 중간에 커트 당하기도.
젊은 시절엔 상당한 미남이었다. 그래서 시마모토의 만화보다 시마모토의 얼굴과 작가 본인을 더 좋아하는 여성팬이 있기도 했다. 시마모토가 젊은 시절엔 만화 외에도 만화 잡지에 본인의 사진을 건 인터뷰나 칼럼을 연재하는 코너가 있기도 했다. 만화보다 그 코너가 더 인기있었던 적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담당 편집자 미카미 신이치는 살짝 바보같지만 친절하고 쾌활한 호청년 만화가로 이미지 메이킹을 해주었으며
시마모토는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 라고 연기하느라 많이 고생했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한다. 예로 역경 나인 실사 영화에는 호노오 모유루로 출연하였다. 스텝롤에도 떡하니 "호노오 모유루 역 : 시마모토 카즈히코". 주제가를 직접 부르기도 했다. 일드판 아오이 호노오 최종화에서도 바이크점 사장으로 까메오 출연해 주인공에게「아니야… 자네는 이 바이크에 타고, 내일을 향해 달려가는 거다!! 잘 들어라. 어른이 됐다고 "학생일 때는 좋았는데" 라고 돌아보는, 시시한 어른만은 되지 마라!」라는 명대사를 남겼다.학창 시절 연극을 한 것도 있고 본인도 배우 욕심이 있다.
가면라이더(1979)의 배우 오디션을 보려고 생각했지만 사정이 있어서 못 봤다고. 학창 시절엔 영상학과 친구들이 만드는 과제물 영상에 배우로 여러 차례 출연했었다. 그런데 뭘 연기해도 웃기다는 소리를 들어서 포기했다고 한다.
시마모토는 스스로 만화보다 본인이 웃기다는 것은 만화가로서 불명예라고 생각한다지만 실제로도 본인이 더 웃기니까 어쩔 수 없다.
친구인 만화가 겸 평론가 야마다 레이지(山田玲司)의 유튜브에 게스트로 출연했다가 야마다가 "역시 넌 인터넷 방송을 해야한다."
라면서 방송을 권유하고 장비와 방송 노하우 지원을 해줘서 2023년 니코니코 동화와 유튜브에
"시마모토 카즈히코의 절규 대학"이라는 채널을 개설했다.
개설 초기부터 폭주하는 방송 스타일을 보여주고, 아다치 미츠루, 아오야마 고쇼 등 거장 만화가를 게스트로 불러와서 화제이다.
어시 말로는 시마모토는 원래 "나는 버튜버가 될 거다!" 라고 했는데 주변에서 그러면 안 웃기다고 말려서 얼굴까고 방송한다고 한다.
오사카예술대학에서는 후에 가이낙스를 세우는 멤버들이나 다른 업계인들과 동기가 되었지만 사실 친분은 그다지 없었다고 한다. 아오이 호노오 작중에서도 안노 히데아키, 야마가 히로유키, 아카이 타카미와 접점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당시 대학에서 과제로 제출한 안노의
애니메이션의 퀄이 너무 높아 애니로는 이놈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서 만화로 주전공을 옮겼으며 마음 속의 라이벌로 여겼다고 한다.
반면 안노와 오카다 토시오 등 가이낙스 창립 멤버들은 시마모토는 자신들하곤 다른 과라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고 하며 훗날 "라이벌이라니 그건 그 인간이 멋대로 망상한 거라고"라고 말하였다. 사실 작품 내에서도 호노오는 안노가 내놓는 작품에서 보이는 재능에일방적으로좌절하거나 속을 끓이거나 할 뿐 실제로 안노와 인간관계다운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그나마 시마모토랑 친했던 멤버는 야마가 히로유키 뿐이었다고.
시마모토는 안노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안노 말로는 "너 좀 특이해서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한다. 안노 말로는 "시마모토는 매사를 승부라고 생각하는 녀석."이라고 하며 농구할 때 "우오오오 나에게 기회를 다오오오오오!" 하고 열혈 대사를 외쳐대서 좀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으며 나중에 만화책을 보고 "캐릭터가 전부 작가 본인이잖아."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시마모토가 재학 중 만화가 데뷔해서 화제일 때 친구들하고도 이야기했는데
"이 녀석은 만화보다 본인이 더 재밌어."라는 의견이 공통되게 나왔다고.
그래서 호에로 펜을 봤을 땐 "이 녀석은 본인이 더 재밌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게 대학생 때는 둘이 별로 친하지 않은 듯하지만 이 사실을 안노가 알게된 이후에는 서로 친해져서 이후로는 자주 접촉이 있다고 한다.
오카다 토시오하고는 별로 친하지 않은데 불꽃전학생이 가이낙스에서 오카다 토시오의 주도로 애니메이션화 된 적이 있지만
원작의 극초반 부분만이 제작되었을 뿐더러 내용도 상당히 변경되었다.
이는 오카다 토시오가 이런 작품은 재미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다고 생각해서 멋대로 바꾼 거라고.
시마모토는 이것에 대해서 불만을 느꼈으며 오카다를 패러디의 소재로 삼은 적이 있다.
다만 이후로는 오해를 풀고 비교적 괜찮은 사이가 된 듯하다. 아오이 호노오를 취재할 때 오카다가 가장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오카다의 저서 표지를 그려주기도 했다. 아오이 호노오에 나왔던 그 그림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