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스압)SF로 보는 에반게리온(구판)의 주제
본문
구 티피반 1~24화 + EOE 기준의 이야기고, 당연히 주관적인 해석이니 걸러 듣길 바람
에반게리온이 다루는 주제는 결국 "소통"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함
이걸 따라 올라가 보면 건담이 나오고, 그걸 다시 따라가 보면 나오는 고전 SF 소설이 하나 있음
1953년에 나온 유년기의 끝인데
안노가 이 소설에서 영향을 직접 받았는지
아니면 유년기의 끝의 영향을 받은 건담을 빨면서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에바는 저 소설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봄
유년기의 끝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절대로 서로를 오롯이 이해할 수 없는 인류는 평생 싸우다 자멸할 운명이었는데
그걸 "오버마인드"라는 초월적인 존재가 "오버로드"라는 하수인을 보내서
인류가 하나로 "합일"되도록 도와줌으로써
개체와 전체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서로를 오롯이 이해하는 "진화된 존재"로 거듭난다는 거임
우리 입장에서 보면 개체의 종말은 곧 죽음을 의미하니까 매우 섬뜩하긴 함
다만, 철저하게 "관객"의 입장에서, SF적으로(?) 해석하면 이건 말 그대로 "진화"일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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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라인홀트 니버라는 사람이 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는 "피조물성"이라는 단어가 나옴
저자가 신학자인 만큼,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 규정하고, 거기에 근거한 특징을 말하는 단어인데, 이게 무슨 뜻이냐?
"각 인간과 전체 인류의 이런 근절할 수 없는 유한성과 특수성을 표현하기 위해, 니버는 또 다른 성서적 범주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포함하는 모든 생명의 피조물성(creatureliness)이다."
대충 요약하자면, 인간은 절대로 자신이 살아온 시공간적인 맥락을 초월해서 사고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의 사고는 결국 공동체, 문화, 국적, 인종, 젠더 등의 "살아온 맥락"에 귀속된다는 것임
즉, 인간은 그러한 "피조물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서로를 오롯이 이해할 수 없다는 뜻임
타인의 입장에 서볼 수가 없으니까
이건 유년기의 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건담에서도 다룬 주제임
"의지만 있다면" 오해없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진화한 신인류, 뉴타입이란 설정
건담에서는 이러한 피조물성을 "부분적으로" 극복했음에도 결국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해서 비극이 거듭됨
오해 없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어봐야 살아온 시공간적 맥락을 초월해서, 오롯이 타인의 입장에서 사고할 수는 없었으니까
샤아는 아무로를, 아무로는 샤아를 결국 이해 못함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이카리 유이가 계획한 인류보완계획 또한 피조물성을 극복하는 과정임
다만, 에반게리온에서는 이를 부정적으로 해석함
단순히 "개체의 소멸이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만은 아니고
타인과의 교류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신지가 충동적으로, 도피성으로 택한 선택이기 때문임
서드 임팩트를 일으키는 주체는 설정딸으로 치면 생명의 열매와 지혜의 열매를 모두 취한 신적인 존재이고
작중 메타포로 해석하자면 인류의 어머니(릴리스)+신지의 어머니(유이)+어머니의 복제품(레이)가 합해진 마망 그 자체임
관점을 달리 하면 타인과 관계를 가지는 것에 두려움을 지닌 아이가 엄마의 치마폭에 숨는 것으로도 볼 수 있고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인류가 피조물성을 극복하거나, 받아들이는 게 아닌
신적인 존재에게 특혜를 받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음
그나마 마지막에 신지가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서드 임팩트를 멈춰서 아스카가 돌아오는데
(이건 해석에 따라 아스카 본인의 의지가 강해서 돌아왔다고도 함)
신지는 또 타인의 대한 두려움이 생겨서 그런 건지 그녀의 목을 조르다가 품
(이것도 해석에 따라 아스카의 피학증? 파멸욕?을 충족시켜주려고 그렇다고도 함)
어느 쪽이건 신지는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수용하기로 한 것임
바로 이 지점을 EOE 본편에서 미사토가 신지를 야단치는 씬과 연결해보면 에반게리온의 주제는 꽤 간단하게 요약됨
피조물성을 지닌 인간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내가 타인에게, 타인이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행위이고
이는 엄청난 두려움을 수반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행위이며
설령 자신의 행위가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어른"의 자세다
라는 것이 내가 해석한 에반게리온이었음
지금 와서는 안노 본인의 행적과 더불어 신장판 국내 여론이 너무 악화된 상태라
본편에서 나온 "어른이 돼라"라는 대사를 안노 본인의 "오타쿠(팬덤) 적대적인 태도"에 착안하여 작가주의적으로 그렇게만 해석되는 경향이 있는데
안노의 스탠스를 생각하면 헛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만 해석되는 것도 좀 안타까운 일이었음
거기에 더해서 그 부정적인 여론이 구작에게도 미치는 바람에
"아무것도 없는데 씹덕들이 뇌절 해석해서 그럴싸해보이는 작품"으로 격하되기까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말한 부분들은 본편~EOE까지 일관되게 연출됐던 메타포, 내러티브, 드라마였고
(그게 처음부터 정교하게 설계돼 있었다곤 생각되지 않지만)
"주어지는 진화"를 부정하고, "스스로 나아가려고 하는 신지"의 모습이 원본과는 정 반대의 의미로 "유년기의 끝"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나는 적어도 구 TVA~EOE를 애니메이션 역사상으로도 손에 꼽는 SF걸작이라고 생각함
근데 신장판? 흠.........
솔직히 난 이 작품이 "씹덕들아 그만 좀 해라, 물론 나는 계속 할 거다"라는 의미를 품었다는 건 아주 비약이라 생각하지만
내러티브 면에서는 EOE의 하위호환, 동어반복에다
9년의 공백기는 도저히 프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안노는 주리를 틀어야 한다고 생각함
초반부 파리 복구씬, 전투 시퀀스, 마지막 전투씬에 이르러서는
Q에서 보여주던 감각적이고도 정교하고 세련된 장르물으로서의 쾌감도 없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