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가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만 따져도 700여년, 민간에서 민담과 이야기꾼의 이야기로 소비되어온 시절까지 합치면 2천여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사랑받아온
동양사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라 당연히 이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도 다양한 형태로 재해석을 거쳐왔는데
이는 초반부의 메인 빌런 역할을 맡으며 큰 존재감을 발휘하는 동탁도 예외일 수 없다
창천항로를 위시한 작품들에서 사용되는 "관습과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난폭한 개혁가"라는 재해석은 이제 참신하지 않고 질릴 정도
서량 군벌일 때는 어쨌든 협천자 이후의 동탁의 행보를 봐서는 아무리 봐도 그냥 욕심 가득한 폭군이지
난폭한 개혁가는 좀 재해석을 위한 재해석 수준의 어거지 재해석 같다는 점은 둘째 치고...
여하튼 이번에 언급하고자 하는 건 여기서는 아는 사람 많을 마사토끼가 스토리 작가로 레진에서 연재하고 있는 삼국지 가후전 속의 동탁
가후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보니 가후가 참모로 일했던 동탁의 서량군 역시 초반부의 주인공격인 세력으로 등장한다
초반의 동탁은 강대한 야심을 지니고 카리스마로 난폭한 서량군을 통제하는 마왕과 같은 이미지로, 기존의 이미지와 큰 차이 없이 등장한다
거기서 큰 전환점이 되는 것이 실제로도 서량군에게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었던 이 사건
하진 세력이 십상시를 상대하기 위해 각지의 군벌을 낙양으로 불러들이는 악수를 두게 되고 야심 만만한 동탁은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량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향한다
그러나 낙양으로 향하던 중 장안성에서 갑자기 서량군을 단 한 명의 남자가 막아선다
다름아닌 여포
군대 vs 단 한 명의 남자라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약육강식의 짐승처럼 난폭하게 살아온 서량군은 여포의 압도적인 무에 경도되고,
무장이 아닌 가후는 여포의 무가 범상치 않음을 느끼면서도 군대가 단 한 명에게 묶여있을 이유가 없다는 이성과 이치에 따라 공격을 진언하지만
이미 생물의 본능에 가깝게 겁을 집어먹은 동탁과 서량군은 단 한 명의 남자에게 공격도 하지 못한 채 발이 묶여 대치하는 굴욕을 겪게 된다
결국 정황상 여포가 정원의 수하라는 것을 간파한 가후는 어차피 조정의 명에 따라 길어도 반나절 안에 정원도 낙양으로 향하게 될 거고
그럼 여포도 여기서 물러날 수 밖에 없다고 진언하고 동탁도 크게 반색하는데
아무리 봐도 여포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심해하는 듯한 동탁을 보고 가후는 지금껏 봐온 동탁의 난폭한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에 크나큰 위화감을 느낀다
여하튼 가후가 예상한 대로 반나절만에 여포는 장안성에서 철수하고 동탁군은 그대로 낙양으로 진군
허나 뜻밖에도 그 사이 십상시가 하진을 주살하고 어린 황제를 데리고 도망치는 혼란이 벌어지는데
가후는 십상시들을 제거한 뒤 그 속에서 황제도 제거하고, 황제를 지키지 못했다는 명분으로 대장군파도 제거함으로써
동탁의 천하를 완성하라고 조언하나 동탁은 뜻밖에도 황제가 손아귀에 들어온 상황에 황제를 옹립한다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기울어가는 한나라를 끝장낼 인물로 동탁을 선택하여 일해온 가후는 오히려 왕조 말기의 혼란을 더욱 크게 퍼뜨리게 되었을 뿐이라고 후회하며
자연스레 두 사람의 사이는 소원해지게 된다
그리고 이후 이러쿵 저러쿵 다들 아는대로 동탁은 여포를 수하로 포섭하는 데 성공하고 반동탁 연합을 거치며
도망치듯 장안성으로 천도하여 흥청망청 사치를 부리며 폭정만 일삼는 상황이 되는데
어느 날 동탁의 경호를 맡던 여포에 대해 불온한 소문이 들려온다
다름아닌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밀통하고 있다는 소문
황궁에서 일하는 시녀들 사이에서는 파다한 소문이고 실제로 동탁의 침소에서 여포 장군과 초선이 밀담을 나누고 있는 것을
똑똑히 들은 시녀가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이 소문은 여포의 귀에도 들어가고 시녀와 밀통 같은 건 금시초문인 여포는 이 불손한 소문의 정체를 찾아보려 해보지만 꼬리조차 잡지 못한다
그리고 평소와 같이 동탁이 침소에 들 시간에 인사하고 떠나다가 이상한 낌새에 돌아온 여포는 동탁의 침소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소문의 근원이었던 초선과 정체불명의 남성이 밀담을 나누는 소리
소문의 정체를 밝혔다고 생각한 여포는 진노하며 동탁의 침소에 뛰쳐 들어가는데...
소문의 진상은 어처구니없게도 동탁이 여포의 목상을 침소에 가져다놓고 자신을 초선이라는 소녀로 분하여
여포 장군과 밀통하는 1인 2역의 역할극을 하고 있었던 것
초선이라는 시녀는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이었고 여포 역시 동탁이 연기한 것이었다
스스로도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탁은 그만두지 못한 채 계속 해오다가 결국 다른 사람도 아닌
당사자인 여포에게 덜미를 잡혀버렸고 동탁은 연의에서 여포와 초선의 밀회가 발각되었을 때처럼 창을 던져 여포를 쫓아낸다
결국 절대로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봐버린 여포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왕윤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가
동탁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왕윤의 설득에 역사처럼 동탁을 주살하게 된다
즉, 정리해보면 장안성에서 여포를 만나 압도당한 뒤부터 그간의 동탁과 다른 모습에 가후가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는
극한의 남성성을 추구하며 서량 군벌을 휘두르고 약육강식의 패도를 걸어왔던 동탁이,
자신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힘, 즉, 초월적인 남성성을 갖춘 여포에게 생물 대 생물로서 압도당한 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가후의 조언도 무시한 채 황제를 옹립한다는 선택으로) 순수한 무사로서의 길과 패도를 모두 포기하고
그저 강대한 여포 장군님에게 안기고 싶어하는 소녀가 되어버린, 속된 말로 "암컷 타락"을 해버렸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동탁의 캐릭터성만이 아니라 서량의 강대한 군벌이었던 동탁이 협천자 이후의 무능한 폭군으로 변신하는 과정,
초선과 왕윤의 연환계의 전개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재해석이 들어갔는데
어처구니없으면서도 나름대로 묘하게 납득은 가는 재해석이라 아마 이후에도 이 이상으로 파격적인 동탁의 재해석은 안 나오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