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와 동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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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애니메이션 감독. 본명은 하야시 시게유키(林 重行). 1941년 1월 22일 생. (82세)
린 타로는 회사를 이곳 저곳 옮겨 다녔으므로 본명을 쓰기 곤란해져서 만든 필명이라고 한다.
1941년 1월 22일 일본의 도쿄에서 출생했다. 1958년 일본 토에이 동화에 수천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겨우 17세였다. 미술을 전공한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입사가 어려울것으로 보였지만, "날 뽑아주지 않으면 ■■하겠다!"라는 반 협박으로 입사에 성공했다는 일화가 있다한다.#당시토에이는 최초의 상업 극장 애니메이션 "백사전"을 제작중이었는데 그는 제작보조로 참여하여 경력을 시작했다. 토에이에 들어간 이유는 원래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1]애니메이션을 하는 걸로 목표를 변경했다고 한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에 있으면 언젠간 실사 쪽하고도 인맥이 생겨서 옮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린 타로가 본격적으로 애니메이터로서의 길을 걷게 한데에는데즈카 오사무와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데즈카 오사무는 토에이 동화와 합작으로 "서유기"를 제작했는데 여기에 린 타로를 기용한것이다. 린 타로는 작화 파트에 참여하는 한편으로 선배 애니메이터들을 위해 삼장법사로 분장까지 하는 열의를 보였다. 이런 열의에 감동한 데즈카 오사무가 그를무시 프로덕션에 끌어들이게 된다.[2]린 타로는 작화보다는 연출에 더 관심을 보였는데 토에이는 연출팀은 대졸자만 받아주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슨 이런 권위주의적인 회사가 다 있냐며 일을 매우 대충했다고 한다. 토에이에서는 일은 안 하고 돈만 받아가는 악질 직원으로 불렸다고 한다. 데즈카는 그에게 연출을 시켜주기로 했고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 "철완 아톰"에 연출로 참여하고,[3]여러 무시 프로덕션의 작품들에 참여했지만 결국 무시 프로덕션이 도산하자 스탭들이 뿔뿔히 흩어지면서 린 타로 역시 무시 프로덕션을 떠나게 된다.
이후 데즈카 오사무와 더불어 당대 만화계의 양대 산맥중 한 사람이었던이시노모리 쇼타로와 만나면서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사무와 도리모노히카"의 애니화에 참여해 자신만의 연출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애니메이션계에 깊은 인상을 준 린 타로는 이후 여러 작품을 거치면서 감독의 경력을 쌓아나갔는데 특히 72년작 "무밍"의 연출은 그를 유명한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이후 린 타로는미야자키 하야오등 인재가 떠난 토에이 동화의 요청으로 다시 토에이 동화로 돌아오게 된다. 토에이에서 일하던 시절 린 타로를 좋게 봐주던 사람이 성공해 토에이의 프로듀서가 되어 린 타로를 불러줬다고 한다. 린 타로는 풀 애니메이션 기법을 포기한 토에이 동화에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을 전수하며 토에이의 TV 애니메이션 전성시대를 열게 했다.마츠모토 레이지원작의 "우주해적 캡틴 하록"의 애니화가 그 대표적으로 오늘날까지도 린 타로 하면 "캡틴 하록"이라 할만큼 그의 명성을 굳힌 작품이 되었다.
그뒤, 마츠모토 레이지 원작의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 감독으로 활동하여 극장 애니메이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 린 타로 감독은 자신의 컷 구성과 영상 연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은하철도 999" 극장판을 대흥행 시키게 된다. 린 타로가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 감독을 맡게 된것은 당대에 TV판 감독이 극장판 감독까지 겸하던 관례하곤 맞지 않았는데 이는 토에이 동화의 사장이 "캡틴 하록"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린 타로에게 극장판 제작을 부탁했기 때문이라는 일화가 전한다.
이후 80년대에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제작에 집중하게 되는데, 여기에는카도카와 쇼텐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다. 카도카와 쇼텐은 극장용 애니메이션 시장의 진출을 모색하던중 린 타로 감독을 영입하게 된것이다. 이는 토쿠마 쇼텐의 지원을 받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묘한 라이벌 구도를 만들기도 하는데, 어쨌든 카도가와와의 협력으로 만든 극장판이 83년의 "환마대전"으로 83년 일본 박스오피스 8위에 드는 기염을 토한다.
이후 85년 "카무이의 검"은 린 타로 감독의 영상연출이 극에 달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이듬해에는데즈카 오사무원작의 "불새/봉황 편"을 연출했고, 87년에는카와지리 요시아키,오토모 카츠히로등과 함께 옴니버스 형식의 실험적인 애니메이션인 "미궁 이야기"중 라비린스-라비린토스를 제작하기도 했다.
90년대에는 OVA시장에 뛰어들어 좀더 자유롭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만들었다. 이때 좀아방가르드에 심취해 지나치게 난해하고 대중성이 부족한 작품을 많이 만들어 사람들에게 잊혀지기 시작한다. 특히 이때 만들었던OVA인 X전차로 가자, 바람의 마타사부로, 다운로드 나무아미타불은 사랑의 시는 매우 뛰어난 작화와 영상미를 갖췄으나 상업성이 지나치게 없어 DVD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이후 카도가와와 다시 손을 잡고CLAMP원작X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게 된다. 초기 난항을 겪던 엑스 극장판 제작은 린 타로 감독이 연출하고엑스 재팬이 음악을 맡은 뮤직비디오 "더블 엑스"에서 절정의 비주얼을 선보여서 극장판 본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보니 허망하기 짝이없는 스토리의 작품이었다. 도쿄 붕괴등의 장면들에서는 린 타로 감독의 절정의 비주얼 연출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것 빼곤 사실 볼만한게 없기도 하다. 다만 이 X 극장판은 이 정도로 일본을 개박살내는 영상미의 작품이 없어 희소성이 있었고 훗날아방가르드영화로서 재조명을 받았다.
그후 99년에는 피터 정이 캐릭터 디자인을 담당했던 "알렉산더 전기"의 프로듀서를 맡았고 2001년, 데즈카 오사무 원작의 "메트로폴리스"를 제작했다. "메트로폴리스"는 여전히 아방가르드를 추구했지만 그렇게 난해하지 않은 연출을 사용했고 2D와 3D의 조화가 돋보이는 비주얼로 린 타로 감독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은로저 이버트에게 만점을 받는 쾌거를 올렸다. 마지막 2D 작품으로는 "캡틴 하록"의 사실상의 후속작이라 할수 있는 "우주해적 캡틴 하록"이 있다.
2009년 개봉한 미일 합작 3D애니메이션 "요나요나펭귄"의 감독을 맡았다. 요나요나펭귄 이후로는사쿠라장의 애완 그녀엔딩 콘티에 참여한것 말고는 활동이 뜸하다. 이후로는 대담이나 인터뷰론 얼굴을 보이는데 나이 문제로 장편 일은 은퇴하기로 한 것 같다.
개인 제작 단편은 유튜브에 올리며 계속 만들고 있다. 직접 프로그램을 배워서 타블렛 PC로 그려내 만든다고 한다. 2021년에는환마대전상영회에 나타나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밝혔다.
2022년 유작으로 자신과 주변인들의 생애를 그린 자서전 만화를 그리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 팬과 출판사의 요청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라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출간될 것이며 일본에선 출간 예정이 없다고 한다.
연출 특징
영상미는 일본 감독 중에서도 최고급이다. 작화, 배경, 촬영 (조명), 색채, 이펙트 모든 분야의 재능이 있어 작품의 영상을 아름답게 만들어낸다. 액션 연출도 잘 하고 영상에 있어서는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췄다. 그리고 여기에 돈까지 크게 써서 최고급 영상을 만들었다. 린 타로 작품은 특히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기로 유명한데. 메트로 폴리스 같은 경우엔 거의 10억 엔을 썼고 다른 작품도 당시 평균에 비해서 제작비를 많이 썼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영업 수완이 뛰어났던 것도 있고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사장이나카도카와 쇼텐의 사장 카도카와 하루키가 그를 매우 총애했기 때문이다.스튜디오 지브리가 생기기 전까지 일본에서 제일 돈을 많이 쓰는 감독이었다.
또한 캡틴 하록부터는 작품의 색채를 어둡게 하고 슬픈 음악을 선정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래서니힐리즘에 충만하고 글루미한 정서가 작품에 깊이 깔린다. 폐허나 폐가,황야가 많이 나오고 작품 클라이막스에 도시 같은 게 크게 파괴되는 장면이 들어가는 것이 특징이며 이것을 린 타로의 파괴적 미학이라고도 한다. 도시가 파괴되는 걸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맞다. 좋아서 하는 연출이다." 라고 하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은 콘티의 연출이 곧 그대로 화면이 되므로 편집이란 개념이 없어도 되나 린 타로는 편집의 개념을 도입했다. 특히데즈카 오사무가철완 아톰을 만들 때 장면 전환을 할 때 휙휙 넘기는 버릇이 있어 이를 보완하고자 페이드 인, 페이드 아웃,디졸브같은 영화 편집 기법을 애니메이션에 도입했다.
애니메이터 출신으로서 원화를 겸하던 인물이라 콘티를 매우 잘 그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고 그려도 될 정도로 원화 수준의 콘티를 그려내며 필요하면 배경까지 그려 넣는다. 자신이 하는 작품의 캐릭터 디자이너의 화풍을 파악하고 그대로 콘티를 그린다고 한다. 은하철도 999의 콘티는마츠모토 레이지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여기에 빨간 사인펜으로 편집에 대한 지시를 세세하게 넣는 것이 특징이다. 필요하면 채색까지 했다. 또한 완벽 주의라 총감독이나 총감수 이런 것보단 자신이 직접 감독하고 콘티를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고된 작업 분량 때문에스기이 기사부로나토미노 요시유키보다 빠른 은퇴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뛰어난 연출력이 있고 세계적인 팬이 있으나 세계적인 유명세에 비해서 한국에선 별로 유명하지 않다.[5]
주로 같이 작업하는 애니메이터는코마츠바라 카즈오,카나다 요시노리,스기노 아키오,노다 타쿠오,카와지리 요시아키,카네모리 요시노리,무라키 야스시등이 있다.오토모 카츠히로를 애니메이션 업계로 끌어들인 인물이기도 하다.[7]같이 일하는 프로듀서로는마루야마 마사오가 있다.미술감독은 무쿠오 타카무라(椋尾 篁)가 있다.
자신이 신뢰하던 스태프인코마츠바라 카즈오,카나다 요시노리, 무쿠오 타카무라가 모두 단명해서 안타깝다고 한다.
기타
마츠모토 레이지팬들이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마츠모토 레이지 작품을 애니화하면서 자꾸 자기 색깔이나 오리지널 설정을 넣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츠모토 레이지가 말년에 대부분의 작품을 미완으로 처리하면서 이젠 오히려 마츠모토 레이지 팬들이 "린타로가 더 좋았지." 하고 갈아타고 있다. 마츠모토 레이지 특유의 느낌을 자신의 색으로 바꿔놓긴 했지만 작품성 면에서는 마츠모토 레이지를 능가하는 점도 많아 받아들여야 하는 애증의 관계.
동생이 애니메이터 하야시 마사유키.내일의 죠,라 세느의 별,얏타맨등의 애니에서 굉장한 작화와 연출을 보여준 연출가 겸 작화감독이었다. 그러나 병으로 눈을 실명하고 비관하다 1985년 경에 ■■했다고 한다. 셋째 동생은 유명 드러머 하야시 유타카이다. 동생의 영향으로 린 타로도 악기를 좀 다룬다고 하며 작품의 음악 선정을 대단히 잘 한다.
비슷한 연출을 하는 감독으로는야마우치 시게야스,소토자키 하루오가 있다. 다만 이 둘은 린 타로를 보고 배웠다기 보단 우연히 비슷해진 경우에 가깝다.
한국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며 내한하면 인터뷰를 친절하게 잘해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영화를 배우다 애니 업계에 와서 애니메이션 연출을 잘 모르던토미노 요시유키에게 애니메이션 연출의 기초를 가르쳐준 선배이기도 하다. 그런데 토미노가 신인 시절 옆에서 "연출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하고 쫑알대는 게 짜증나서 아주 크게 혼줄을 내줬고
자전거를 매우 좋아해서 고가의 자전거를 사기 위해 억지로 쓰레기 같은 작품 일을 받기도 했었다고 한다. 장수와 건강의 비결은 자전거에 있으며 다시 태어나면 사이클링 선수가 될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작품은 잘 찾아보면 자전거가 자주 나온다고 한다.
어릴 때 직접 전쟁을 겪어서 전쟁을 매우 싫어한다고 한다. 3 ~ 4살 때의 일일 텐데 팔순이 지나도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 중 반전을 테마로 다룬 건안녕 은하철도 999: 안드로메다 종착역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