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e) 의외로 세이버를 보는 시각이 조금 닮아있는 둘.
본문
미래의 태닝 양아치와 금발 양아치.
의외로 이 둘은 Fate루트에서 세이버를 보는 시각이 닮아있다.
바로 둘 다 "마지막까지 나라를 지켜내고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해가며 발버둥친 아르토리아라는 소녀"의 삶을 아름답고 존귀하다 여기고, 그 모습을 보며 두 명은 세이버를 두고 대립한다.
거기다 놀랍게도 세이버에 대해 내린 결론도 일치한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한 결과가 그거라면 어쩔 수 없다."라는 것.
둘 다 그 과거에서 해방되어, 집착을 내려두고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라는 메세지를 세이버에게 전달하는 것 까지는 같다.
문제는, 시로와 길가메쉬는 근본부터 "시선"이 다르다.
시로의 경우는 우선 힘없는 일반인에 가깝다. 영웅인 세이버를 동경하며, 그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뒤쫓는 사람. 작중에서 표현되기를, "닿지 않는 별을 바라보는 소년"이다.
시로는 세이버의 소원과 삶을 바라보며, 같은 인간으로서 세이버가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고, 웃으며 살아가길 바란다.
심지어는 세이버와 동질의 상처를 품고, 비슷한 가치를 향해 발버둥치면서도 그렇기에 더욱 세이버에게 보답과 구원이 찾아오기를 바란다.
동시에 "과거를 짊어지는 것"이야말로 구원이자 자기를 긍정하는 힘이 될 수 있음을 세이버에게 보여주며, 그녀를 구원으로 이끌었다.
길가메쉬 경우는 태생부터가 제정자이자 왕. 만인지상이다.
세이버가 영웅이든 기사왕이든 자신의 발 아래에 존재하고, 길가메쉬에겐 세이버 또한 자신의 제정에 범위 안에 들어오는, 자신의 소유물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길가메쉬는 통찰로 세이버가 품은 상처도, 세이버가 소원을 버리고 행복을 추구해야 함도 알고 있지만, 길가메쉬는 그것을 시로처럼 마음속으로 바라거나 하진 않는다.
왜냐? 길가메쉬에게 있어서 세이버의 행복은 "세이버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마음대로 빼앗거나 주는 것"이기 때문.
그것이 상대에게 행복이 되지 못한다는 사고방식은 없다. 왕이니까. 왕이 주는 것은 모두 은혜고, 감격하고 울부짖으며 복에 겨워해야 하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길가메쉬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소유자와 특별한 소유물로서 세이버를 아끼려 하고, 친히 행복을 내려주겠다 선언한다.
같은 상처를 품고, 아픔을 공유하며 세이버의 구원을 바라는 소년과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그녀의 상처마저도 소유하려하며, 세이버의 구원을 "자기 뜻대로" 결정하려는 왕.
똑같은 결론을 내린 두 사람이라도 어느 쪽에 마음이 갈진 당연한 것이었다.
덤으로 시발 길붕이새낀 대사 하나하나가 문제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