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신에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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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반게리온의 위화감은, 역시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는 세계관이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이 이런 반응을 돌려주는세계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성장을 하는 주인공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화해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이다」라는점이 전부 뒤집힌 데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종류의 리얼리티 라인의 변경과 같은, 그것까지는 암묵적으로 그어져 있던 선이 붕괴해,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차례차례로 일어났다. 거기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어느새인가 성장해 행복하게 되어 있어, 축복은 하고 싶지만 모르는사람과 같이 느낀, 같은 느낌」이라는 에바평이 되겠지.
단지 그 「암묵의 선긋기」라는 녀석이, 명확한 의사를 가지고 설정되어 있었다기보다는, 감독의 현실세계에 대한 세계관에의해 트리밍 되고 있던 라인인 것이며, 감독의 세계관이 바뀌는 것으로 작품도 바뀌었다는 일일 것이다. 감독과 싱크로 할수 없는 자신으로서는 그렇게 보여 버렸다.
그것을 성장이라고 말하면 아름다운 것이지만, 「타인으로부터 바라는 대로의 상냥함이 주어지는 일은 없다」 「바라는 대로가아닌 상냥함을 받아들이는 인간으로는 될 수 없다」같은 폴리시로 팔아·팔려 온 작품이 시원스럽게 방향 전환해 버린 것처럼보여, 개인적으로는 「납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감이 있다.
어쨌든 거기를 방향 전환해도 좋은 것이라면, 25년전에 구에바가 울며 아우성치고 있던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애초에자신은 거기가 에바의 싫은 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지만. 그것을 「뭐 그것이 에바의 아이덴티티인 것이니까존중하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최후는 그것을 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바라는 대로가 아닌 타인의 상냥함」를 받아들여도 아직 남는 고투에 대해서는 일약에 「그런 것은 넘은스테이지」로 도약해 버리고 있다. 그것을 넘을 수 있는 것은 감독이 반려를 얻어 도달한 경지가 있기 때문이지만, 그사이에 있는 골짜기를 도약 할 수 없는 인간은 골짜기의 밑바닥에 따돌려진다.
그 근처의, 감독이 일약에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무시해 버리고 있는 고투의 이것저것이, 그 유토피아의 부자연스러운부분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감독 자신은 새로운 스테이지에 이를 수 있었지만, 왜 자신이 그러한스테이지에 이를 수 있었는지가 자신에게도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묘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지.
요컨데, 반려를 얻은 것에 의해 라이프 스테이지가 진행되어, 과거의 스테이지에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 어떻든지 좋아져버렸다. 그러나 스테이지로 나아가는 계기인 반려를 얻은 프로세스가 「이해심이 있는 그녀가 갑자기 나타났다」니까,스테이지로 나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능숙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말할 수 없는」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 유토피아의 부자연스러움이고, 또 작중으로 갑자기 사용되기 시작한「인연」이라는 말일 것이다. 무엇을 했던 것이 좋았다, 라는 것은 말할 수 없고, 다만 「인연」에 의해 구해졌다고 밖에말할 길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뭐 세상 실제 그러한 면이 있으니까 곤란하지만.
안노 감독이 「나의 신부 최고!!」를 신극에서 하려고 한 결과, 「CDIO(찌찌가 큰 좋은 여자)」가 출력된 걸로,나의 에바는 대원단…… 좋은거야, 이제.
안노 감독, 마리를 낸 시점에서 구제되어 버리고 있었을 것이다.
신고지라나 신울트라맨은 제 3마을에서의 생활인 거야.
제 3마을은 「너무 유토피아」같이 보는 시선도 있지만, 「“좋은 사람”으로 있을 수 없는 인간에게 있을 곳은 없을 정도로여러 가지로 어려운 커뮤니티」라고 해석하면, 극중의 묘사만으로 충분히 무섭지요. 그 마을에는 “싫은 녀석”에게 할애할리소스는 없는 것이다.
뭐, 현실 사회도 그렇게 되고 있지만.
마리의 보컬 트랙만 모은 CD 갖고 싶구나.
그 때의 추가의 신곡은 『찌찌가 크고 좋은 여자 선창』으로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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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노 모요코 설은 안노 본인이 완강하게 부정하고 있으니까 그부분에 대해서는 걸러서 보더라도 어느정도 신에바의핵심을 꿰뚫는 리뷰라고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