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고13) 사이토 타카오
본문
고르고13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사이토 프로덕션의 소개글에 의하면 본인은 듀크 토고처럼 폭파, 저격, 암살 모두 못하고,
7개 국어도 못하고, 스위스 은행에 계좌도 없다고 한다.
시라토 산페이, 다쓰미 요시히로와 함께 일본 극화계의 거장들 중 한 명으로
사실상 현재의 극화의 바탕을 만든 인물들 중에 한 명이다.
사이토 타카오는 이시노모리 쇼타로와 친했는데 이시노모리는
데즈카 오사무의 방식을 자기식으로 받아들여 재창조했지만
사이토는 완전히 다른 걸 하겠다면서 데포르메가 없는 사실적인 만화를 그려냈다.
이것이 극화 만화로 발전했다.
당초에는 만화가 가진 한계점 때문에 극화를 시작했으나
점차 만화와 극화가 발전하고 양자간의 교류가 생겨나면서
현재는 만화에 대해서 나쁜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한때는 극화를 만화라고 부르는 것을 몹시 싫어했었다.
데뷔하기 전인 18살때 월간 만화잡지 <만화 소년>의 독자투고란에 응모했는데,
데즈카 오사무가 "나쁜 예"로 들어 "이런 어린이답지 않은 그림과 아이디어는 안된다."라는 평이었다.
그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라고 느꼈다고 정열대륙에서 밝혔다.
그러나 사실관계를 확인하면, 투고란에 데즈카가 혹평한 것처럼 보이는 글은
잡지의 편집자가 쓴 것으로 이 당시 데즈카 본인은 일이 바빠서 만화평을 쓸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데즈카와 반대되는 그림을 추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이발소에 가면 어째서인지 반드시 고르고13이 있다는 것으로도 유명.
실제로 사이토는 만화가로 데뷔하기 전에 가업인 이발소에서 일한 적이 있다.
사실 다른 작품들도 꽤 괜찮은 것을 많이 냈으나 역시 대표작으로는 고르고13이 꼽힌다.
이외에도 주유소의 휴게소나 일반 음식점에서에도 고르고13이 흔하게 책장에 비치되어 있다.
고르고13의 창작에 있어서는 본인이 밀덕도 정치통도 아닌지라 가끔 틀린 내용이 보이기는 하는데,
그래도 고증 자체는 꽤 괜찮게 되어있어서 세계의 정치판국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극화가로 꼽힌다.
심지어 일부 에피소드는 너무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 탓에 대사관에서 항의가 들어와서
단행본화 하면서 미수록된 에피소드가 있다.
그 때문인지 실존인물을 내보낼 때는 좀 이름을 바꾸고 설정을 다듬는데,
생긴 거랑 주변의 정치적인 상황을 보면 누구인지 다 알 수 있다.
고르고13의 경우는 처음부터 시나리오 작가, 연출 작가, 작화 작가를 여러 명 도입해 작업해왔다.
영화의 제작 시스템을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 만화는 아주 극초기 카시혼 (대본) 시절부터 여러 명이 동시에 작업하는 공동 제작 체제가 많았다.
데즈카 오사무도 이시노모리 쇼타로도 아카츠카 후지오도 전부 프로덕션이 있었다.
다른 나라 만화도 마찬가지였고 한국 만화도 그랬다.
단지 한국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사이토 타카오는 여기서 나아가 자신이 없어도 될 정도로 체계적인 프로덕션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래서 그가 죽은 뒤로도 고르고 13은 계속 연재될 것이라고 한다.
도라에몽이나 베르세르크 같은 작품은 작가가 죽고
어시들이 계속 그렸지만 어딘가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만화라는 것이 작화는 어시들이 할 때도 많지만 아이디어를 내는 작업,
그 만화의 느낌과 캐릭터의 성격을 정하는 연출 작업은 작가 본인이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일반적인 만화는 작가 본인이 죽어버리면 100%로 재현하는 게 힘들다.
하지만 고르고 13은 그의 사후에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고 볼만하단 이야기를 듣는다.
사이토가 죽기 전에 얼마나 철저히 준비해놨는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