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싫어하는데 병기는 멋있다는 타입의 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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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우루세이 야츠라(1981) 당시 잡지 인터뷰
1951년 8월8일 생. 도쿄도 오타 구 출신.어릴 때부터 영화 감독을 꿈꾸어서 이미 어린 나이에 카메라를 샀을 정도였다.
1970년 도쿄학예대학에 입학해 영화예술연구회라는 동호회를 만들고 16mm 카메라로 단편영화를 찍기도 했다.특히 SF영화들에 심취하여 당대의 특촬물들을 전부 섭렵하기도 했다.엄청난 영화광으로 일이 없을 때는 일주일에 영화를 10편 정도를 본다고 하며, TV 편성표나 극장 스케줄을 알아내서 시간표를 만들어서 영화를 보기도 했고 제일 영화를 많이 볼 때는 하루에 3편 정도를 봐서 1년에 1,000편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는데 너무 심취해서 학교를 나가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오시이 마모루는 곧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어린 시절부터 할리우드를 능가하는 SF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었지만,일본 영화의 현실상그게 어려웠기 때문이다.졸업시엔 영화계에 갈 생각도 없어 소학교 미술선생으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친구가 원서를 분실하는 바람에 낙방했고, 영화회사들의 문을 두드려봤지만 여의치 않자 한동안 백수 생활을 해야했다. 게다가 겨우 지방 방송국에서 라디오 PD자릴 얻었지만 말이 좋아서 PD이지 사실상 잡역인데다 월급도 너무 적어 반년 만에 때려치고는 히키코모리까지 되고 만다. 그러다가 전신주에 붙어있던 타츠노코 프로덕션 모집공고를 보고는 입사원서를 냈다. 이 때문에 동시대에 활약한 다른 감독, 애니메이터들에 비해서 나이가 10년은 차이난다.
오시이가 안노 히데아키 같은 1세대 오타쿠 세대랑 같이 활동해서 같은 세대로 오해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오시이는 2021년 기점으로 나이 70이 된 사람이다. 오히려 10살 연상인 미야자키 하야오와 친구 먹고 지낼 정도다.
동료인 타츠노코 4천왕 중 3명은 모두 오시이보다 선배인데 오시이가 제일 나이가 많다. 그렇지만 2021년 인터뷰에서는 당장 은퇴 의사는 없고 앞으로 10년은 감독을 더 할 것이라고 한다. 한동안 활동을 안 한 것도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스폰서가 안 붙어서 못했다고 한다.
타츠노코에서도 처음에는 사무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워낙에 일손이 부족해서 영화 제작 경험이 있는 그를 연출 보조에 투입시켰는데 영화를 많이 본 오시이는 금세 어깨 너머로 연출로 원화맨 출신 연출가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발휘하며 이례적으로 연출가로 데뷔했다.
크게 누구에게 배운 것도 없이, 노력도 없이 바로 떠버린 천재 타입 크리에이터이기에 본인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나마 연출의 기초를 가르쳐준 게 사사카와 히로시와마시모 코이치였다.
이때의 오시이는 우에다 히데히토, 마시모 코이치, 니치쿠보 미즈호와 함께 "타츠노코 사천왕"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오시이는 자신에게 현장 기술과 연출을 가르쳐준 스승은 토리우미 히사유키라고 단언한다. 둘은 타츠노코 프로덕션 시절에는 서로 엇갈려서 연출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는데스튜디오 피에로에서 다시 재회하고 닐스의 모험을 만들며 연출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훗날 세계 최초의 OVA작품 달로스를 공동 감독하기도 했다.
직접 만나서 기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가장 존경하는 애니메이션 감독은 데자키 오사무를 거론한다. 데자키의 에이스를 노려라 극장판을 봤을 때 "이건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영화다." 라는 충격을 받았으며 그걸 몇 번을 돌려보며 연출 공부를 했다고 한다. 내일의 죠 2 극장판은 세계 명작 영화와 비견할 작품으로 선정하기도 했다.오시이는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때부터 작화 매수를 많이 안 쓰게 되는데 그것도 데자키의 영향이라고 한다.
오시이를 확실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만든 작품은 바로 "우루세이 야츠라(1981)"이다.
막 이름 내건 초짜가 시청률 20%의 국민적 시트콤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으니 업계의 주목이 모였다.
또한 극장판 1, 2편으로는 자신만의 연출 스타일을 정립해 가면서 호평을 받았다.
이 애니메이션은 중간에 감독이 바뀌었는데 감독이 바뀌자 안 보겠다는 현상이 속출하기도 했다.
지금도 시끌별 녀석들 팬 사이트 중에서는 오시이 마모루 분량만 다루는 사이트가 많이 남아있다.
믿기 힘들겠지만 농담이 아니고 이때의 오시이 마모루는 미야자키 하야오보다 인기 감독이었으며
네임 밸류만으론 토미노 요시유키와 타카하타 이사오와 비볐다.미야자키와 토미노도 이 작품으로 오시이의 이름을 알고
시끌별 녀석들을 직접 시청하고 칭찬하기도 했다.
거기다 최초의 OVA인 달로스를 감독하기도 했다.하지만 1985년에 감독한 애니메이션 천사의 알이 난해한 내용 덕에 대차게 말아먹었고, 이렇게 말아먹은 덕에 불러주는 사람 없는 백수 신세로 전락한다.
이때 시끌별 녀석들을 꽤 감명깊게 봤으며 그 이전부터
오시이와 친했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기획, 프로듀스한 작품 "앵커"의 감독으로 그를 기용했으나
오시이 마모루는 작품관의 차이로 타카하타 이사오와 대판 싸우고
미야자키는 "너희들 그럴 거면 하지 말라"고 해서 작품은 제작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때 밀덕이었던 오시이 마모루와 미야자키는 꽤나 친해졌고 지금도 사적으로 연락하고 서로 기술을 주고받을 정도의 관계로 들어갔다.
흔히 나이 차 때문에 사제 관계로 알려져있으나 오히려 미야자키가 오시이에게 배운다고 할 정도로 대등한 관계에 있다.
젊을 때 미야자키 하야오는 밀리터리, 철학, 종교에 대해서 지식이 너무 풍부해 업계에서 말을 나눌 사람이 없었는데
말이 통하는 사람이 오시이밖에 없어 시끌별 방영 당시부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오랜 공백기에 오시이는 이토 카즈노리의 소개로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제작 집단인 헤드 기어에 초빙된다.오시이 마모루 자신은 패트레이버의 세계관이나 메카닉이 마음에 안 들어서 꽤나 툴툴대긴 했지만, 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일단 기획집단 "헤드기어"에 참여,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구 OVA, 첫 극장판과 두 번째 극장판을 감독한다.TV판에서는 몇몇 에피소드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고, 신 OVA에서도 각본으로 참여했다.
오시이 마모루를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게 한 작품은 1995년작 "공각기동대"로 이 극장판의 성공으로 세계적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후 프로덕션 I.G.의 작품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인랑으로 여기서는 기획과 각본을 맡았다. 한편으로는 실사영화 제작에 주력해 폴란드에서 촬영한 "아바론"을 만들기도 했다.
2004년 "공각기동대"의 후속편격인 "이노센스"를 연출했고, 2008년에는 "공각기동대"를 지금에 맞게 리뉴얼한 "공각기동대 2.0"과 어드벤처물 스카이 크롤러를 내놓았다. 2009년엔 아바론 이후 8년 만의 실사 영화 어썰드 걸즈를 내놓았다.
게임 철기의 후속작 "중철기"의 예고편을 감독하기도 했다.
급진좌파의 철학적인 사유,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인랑(애니메이션)에서도 전공투를 연상하게 하는 묘사가 많아서 혹시 전공투가 아닌가 싶었는데 2008년에 자서전에 밝히기를 실제로 고등학교 때 학생운동에 참여했으며 집에 경찰이 찾아오자 아버지가 기겁해서 학생운동 열풍이 잦아들 때까지 감금을 시켜버렸다고 한다. 그 이후로 자신은 아무것도 못 했다는 무력함에 사로잡혀서 대학생활도 엉망으로 하는 등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동 시대의 다른 좌익 출신들이 나이 먹고 사상이 둥글어지거나 보수로 전향하는 것과 달리 말년에도 여전히 좌익 중심의 이념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애니계의 좌파 중에서도 핵좌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전공투에 대해서는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망해도 할 말이 없다고 하지만 그때 세상이 바뀌었으면 했다는 아쉬움은 계속해서 드러내는 중이다.대신 그런 걸 보여주는 건 개인적인 인터뷰나 타작품 비평을 할 때이고 인랑 등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그렇게 자신의 이념을 작품에 크게 넣지는 않는 편이다.오히려 무력함에 대한 절망이 작품의 테마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리고 물질 사회 비판이 많다. 특히 고층 건물과 신도시를 매우 싫어한다.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원시 공동체 사회로 돌아가자는 극단적인 주장은 안 하지만 인간이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 지론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오시이의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에 대해
"뭔가 있어 보이지만 도쿄가 지나치게 발전한 게 싫고 부숴버리고 싶다는 내용일 뿐이다." 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밀덕이기도 해서 그와 관련해서는 상당히 고증을 잘하는 편이다. 문제는 독일군의 팬이기도 해서 초기작에서는 나치 찬양으로 오해받을 정도의 묘사까지 종종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각기동대로 서양에서 유명해진 뒤로는 자중하고 있다.
그리고 오시이 작품에서 독일 군복은 바보 캐릭터가 입고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독일군 병기도 개그 신에서 주로 나왔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나치를 조롱하는 것으로 보고 그다지 문제삼지 않았다.오시이 작품이 해외에 수입되어도 이러한 장면은 대부분 검열을 당하지 않았다. 밀덕이라고 해서 전쟁을 좋아하거나 우익 사상을 가진 사람은 아니고 오히려 해외의 자료까지 철저하게 팠기 때문에 역사 인식이 상당히 올바르다.즉 전쟁은 싫어하는데 병기는 멋있다는 타입의 밀덕이다.
철학적인 스토리를 다루는 경우가 많아 스토리를 잘 쓰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오시이도 토미노 요시유키처럼 연출, 영상 표현 중시자이다.
언어로는 전달할 수 없는 것이 있고 표현이 잘못되면 일단 재미가 없기 때문에 표현에 중심을 둔다는 게 지론이다.
스즈키 토시오는 오시이는 스토리와 드라마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하기도 했다. 같이 인터뷰하던 오시이도 이를 긍정했다.
물론 철학에 관심이 깊은 사람이라 그런 묘사도 확실히 하기는 한다. 그걸 각본보다는 주로 연출로 전달한다고 보는 것이 좋다.
혼타니 토시아키 말로는 오시이는 다른 건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콘티랑 음악 선정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는다고 한다.
흐름을 끊지 않고 몇 분 이상 같은 상황의 묘사를 계속 이어나가는 롱테이크 연출을 매우 잘 해낸다.
이는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영향으로 보인다.
패트레이버 극장판 1에서는 빠른 액션씬을 긴 롱테이크로 연출해낸 바 있다. 그의 롱테이크와 대화씬과 관련된 연출이 절정을 보이는 것은 패트레이버 극장판 2인데, 특차2과의 자위대 주둔지 출동에 대하여 논의하는 고토 키이치와 나구모 시노부의 대화씬에서 볼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가 대화를 함에도 서로를 쳐다ㅂㅈ 않는다. 또한 카메라는 대화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잡는 것이 아닌 나구모 한사람만을 비추고 있는데, 이때 나구모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고토 키이치 이지만 화면상으로는 관객을 보는 모습이 된다. 거대한 스크린에서 관객을 향해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그러한 연출은 고토 키이치 와 나구모 시노부 두 사람 사이에 껴있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의 위치를 작품 내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고토 키이치는 이 씬에서 나구모를 바라ㅂㅈ 않는다. 어째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ㅂㅈ 않는 것 일까? 이러한 연출은 공각기동대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모토코가 다이빙을 하는 장면, 바토가 찾아와 그녀와 나누는 대화에서도 모토코는 바토를 바라ㅂㅈ 않으며 다른곳을 바라본다. 오시이 마모루는 바토로 하여금 모토코, 그 너머의 관객들과 눈을 마주치며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
애니메이션을 부드러운 롱 테이크로 연출하는 기법은 실력있는 애니메이터와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오시이 마모루 감독 작품은 중요한 장면을 롱 테이크로 연출하기 위해서 그 장면에 애니메이터를 몰아주고 그 이전 분량은 몽타주기법으로 움직임을 아끼는 경우가 많다.
어딘가에서 말을 인용하고 말을 과하게 장황하게 해서 자신의 의견을 1분 이상에 걸쳐 한 캐릭터에게 웅변을 시키는 연출이다. 이 특유의 긴 대사 호흡을 오시이부시(押井節)라고 한다.이노센스의 경우는 플레이 타임이 100분임에도 들어간 인용구와 장황한 대사가 17개. 주로 이런 대사를 하는 캐릭터는 치바 시게루가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밑의 다중 구성과 맞물려 실제 본편의 주제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경우도 있으며 오시이 마모루가 하고 싶은 또 다른 메세지인 경우가 많다.
이런 장광설은 오시이 본인이 좋아하는 장 뤽 고다르의 영향이 크다. 고다르 역시 오시이 저리가라 할 수준으로 장광설과 인용, 토론을 즐겨한다. 중국 여인이나 만사형통 같은 1960년대 고다르 영화를 보면 오시이부시의 유래를 알 수 있다.
오시이는 애니메이션에서 이런 기법을 쓰는 사람이 없고 사사가와 히로시도 하지 말라고 해서 신인 시절엔 이 기법을 쓰지 않았으나
자신의 스승 토리우미 히사유키가 이미 이런 기법을 쓴 적이 있고 해도 된다고 해서 그때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본인은 이런 연출에 대해 팬이 "오시이 작품은 말이 너무 많다. 수다쟁이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토미노 요시유키 씨도 대사 많은데 왜 나한테만 그러냐.
하지만 토미노 씨는 그렇게 하고도 그런 소리 안 들으니까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라고 한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해체, 재해석하기 때문에 원작 팬들은 오시이의 작품을 싫어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원작이 있는 작품 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가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2와 공각기동대 극장판 정도인데, 둘 다 오시이 마모루의 간판 타이틀이지만 완성도와는 별개로 기존 시리즈 또는 원작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져서 그러한 변화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팬들에게 까이는 것이다.
처음에 작품을 맡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원작을 따라가지만, 그 후속편에서 맘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면 원작의 주인공 캐릭터들을 스토리 중심에서 배제하고 긴 러닝 타임 중에 곁다리로 쓰는 한편 오시이 마모루 자신이 감정 이입한 조연들을 주인공으로 격상시키는 버릇이 있다. 그 예로 패트레이버 극장판 2에서 기존의 주인공격 캐릭터들이었던 이즈미 노아나 시노하라 아스마의 비중은 거의 없고, 조연이었던 대장 고토 키이치가 주인공 포지션이며, 공각기동대 극장판의 후속작 이노센스에서도 파트너인 바토가 주인공 포지션이 되었으며, 모토코는 후반부에서야 등장하는 수준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해서는 애증이 교차하고 있어 확실히 비판하긴 한다.
하지만 본인이 그린 4컷 만화 중 "그에게서 영향력을 떨쳐내려고 하다가,
오히려 내가 다른 이들의 대선배가 되었다"라는 다소 자조적인 만화가 있다. 일단은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하는 듯.
또한 스즈키 토시오하고도 친하기 때문에 이노센스 제작에 스튜디오 지브리가 참여하기도하고 라이프워크인 입식사 열전을
지브리 계열 쪽에서 제작하고 친 지브리 애니 잡지인 아니메쥬에 관련 칼럼을 기고하는 등 지브리와 밀접한 관계를 보인다.
오시이 본인은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해선 비판도 하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그래도 나름 스승으로써 존경한다고 밝힌 바 있다.
첨언으로 다카하타 이사오 장례식때 조문하러 온 오시이를 미야자키가 반가워하면서 포옹했다고 한다.
오시이는 미야상이 늙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와의 대담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벼랑위의 포뇨를 대차게 혹평했다. 영화(구조로써의 완성)가 되지 않았다, 미야상의 망상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이것은 타카하타상과 토시오상이 손가락 하나 건들지 않고,미야상 혼자서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해쳐먹은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며, 왜 미야상이 혼자서 폭주하는 걸 내버려 뒀냐고 스즈키 프로듀서를 쏘아붙였다.
이는 오시이의 일방적인 의견이 아니고 벼랑 위의 포뇨는 재밌긴 한데 어떤 내용의 작품인지 모르겠다는 관객평이 다발했던 작품으로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고 할 수 있다.
오시이가 미야자키 작품을 무조건 비판하는 건 아니다.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이나 천공의 성 라퓨타,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은 건 꽤 좋게 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