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봉요원) 유비와 혼수모어. (재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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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봉요원에서 묘사하는 유비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관상술(相人)과 그 혓바닥 솜씨라고 하겠다. 특히 후자는 곧잘 ‘혼수모어(混水摸魚)’란 멸칭으로 불리곤 한다. 혼수모어(混水摸魚)란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물을 흐리게 만들어(혼탁하게 만들어) 고기를 잡는다는 표현으로, 작중에선 의도적으로 혓바닥을 놀려 분란을 일으키고, 그런 혼란을 만든 장본인이면서 본인은 이득을 볼대로 보고는 뒤로 쏙 빠지는 비열한 면모를 비아냥대는 용도로 쓰인다. 그 말대로 화봉요원에서는 유비가 입을 열 때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좌중에 혼란을 일으켰다.
<유비를 "혼수모어"하는 사기꾼이라 칭하는 원소군 장수>
당장 ‘혼수모어’란 표현이 처음 등장한 화봉요원 6권에서 유비는 커다랗게 웃는 것으로 반동탁연합군 참모진에 혼란을 일으켰고, 7권에서도 유비의 사기극으로 안량, 문추를 잡는 교란전술을 펼쳐보였었다.
여기서 이 ‘혼수모어’와 이어지는 것이, 전자의 유비의 ‘사람 보는 눈(相人)’이다. 화봉요원에서 유비는 중요한 순간마다 그 혓바닥으로 자신은 어느 누구든 꿰뚫어 볼 수 있다 자부한다. 그가 정말로 사람 마음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는지는 중요한 점이 아니다. 중요한 건, 이런 ‘관상술’과 ‘혀놀림’은 오로지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 혼수모어(混水摸魚)한 혓바닥의 진가가 잘 드러내는 장면이 바로 32권 260화에서 장료를 설득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그는 죽음까지 각오한 장료에게 말 몇 마디 하는 것으로, 마음을 돌려 조조에게 투항하게끔 만든다. 그러나 이 한 판의 설득은 장료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무대를 마련하여 자신에게 드리워진 의심을 지우고, 조조의 신임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장료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잔뜩 뒤흔들어 놓고선, 본인의 속내를 그 안에 숨겨버리고는 한 몫 단단히 챙긴 것이다. 그야말로 혼수모어한 사기꾼이 아닌가.
앞서 이 혼수모어를 길게 이야기한 까닭은, 유비의 각성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27권 219화, 유비는 도망치는 와중 성 안에 매복한 여포일행의 습격을 받는다. 하늘을 빼곡히 메우는 화살비에 유비군은 궤멸당하고, 그 가운데 유비는 하늘을 향해 통곡한다.
我的耳朵 比常人大,
나의 귀는 다른 사람들보다 크지만,
然而聽到的 却是人間哀號
허나 들려오는 것은 인간들의 절규뿐.
그의 귀는 다른 누구보다 커서 멀리 까지 들을 수 있지만, 죽음을 앞둔 이 상황에는 전혀 쓸모가 없다.
我的手臂 伸起來比常人長,
나의 팔은 보통 사람들보다는 멀리 뻗을 수 있지만,
然而 却伸不到目的地
허나, 뻗어도 목적지에 닿지 않는다.
그의 팔은 무릎 아래로 내려올 정도로 길어 멀리까지 잡을 수 있지만, 죽음을 앞둔 이 상황에선 어떤 것도 잡지 못한다.
유비는 하늘에 외친다. 이제 막 커다란 길大道 위에 올라 발걸음을 막 뗐건만, 어찌하여 여기서 멈춰서야 하느냐고. 이럴 거면 왜 굳이 이렇게 큰 귀와 길다란 팔을 붙여주었느냐고.
그렇게 화살비 속에서 죽어가는 와중에도 유비는 하늘의 뜻을 짐작하려 애쓴다.
바로 다음화, 220화에서 유비군이 궤멸당한 성내에 조조군이 도착한다. 군을 이끄는 장수는 하후돈. 조조군은 성 내부의 정리 작업에 들어가고, 참모들은 역병이 번질까 싶어 유비군의 시체를 모두 불태울 것을 하후돈에게 건의한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로, 여포군이 유비의 시체를 확인하지 못한 것은 조조군이 빨리 들이닥쳐서 였기 때문이라 나온다.)
그런데 그 순간, 어느 시체더미에서 팔 하나가 쑥 뻗는다.
그 팔의 정체는 유비였다.
남들보다 커다란 귀 덕분에, 성벽 위에서 조조군이 나누는 한담까지 잡아챌 수 있었고
남들보다 길다란 팔 덕분에, 시체더미에 파묻혀 있음에도 밖으로 손을 빼낼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필이면 그 장소에 있었던 것이 다름아닌 하후돈이라는 것이었다. 화봉요원에서 천리안(千里眼)의 능력을 지닌 하후돈이었기에 다른 장수였다면 그냥 지나쳤을 광경을 그만이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하늘을 향해 외치던 ‘대체 내게 무슨 가치가 있소’라던 유비의 절규는 참으로 상상도 못할 방법으로 화답 받았다. 하늘의 현기(玄機)는 참으로 기묘한 방식으로 안배를 해놓았던 것이리라.
그 커다란 귀가 아니었다면, 그 길다란 팔이 아니었다면, 조조군이 조금만 늦게 도착했다면, 군을 이끄는 장수가 천리안 하후돈이 아니었으면...
그 중 단 하나의 조건이라도 빠졌다면 유비는 살아남지 못했을 터다.
튀어나온 팔에 흥미가 생긴 하후돈은, 팔의 주인이 궁금하여 본인이 직접 시체더미에서 빼낸다.
팔의 주인,유비를 빼낸 순간 하후돈이 마주한 광경은...
혼수모어(混水摸魚)
하늘이 점지한 유비의 운명. 천하를 진흙탕으로 만들어놓고 그 위에 헤엄치라는 천명(天命)의 상징성.
죽음을 한 발짝 앞두고 살아 돌아온 유비는 천기(天機) 한 가닥을 헤아리게 된다.
자신은 물고기었음을. 물 없는 뭍 위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하늘이 자신에게 헤엄쳐 놀 수 있는 물을 찾으라 지시했음을.
그리하여 유비는 물을 찾아 나선다.
수많은 시체들 사이를 헤엄쳐가며. 그 시체들 사이서 뿜어져 나오는 악취를 참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상류의 형주로.
수어지교(水魚之交)의 사이가 될 수 있는 이를 찾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람을 찾게 된다면,
수많은 고비를 넘긴 유비는, 하늘의 점지한 대로 그 혓바닥을 가지고 천하를 진흙탕으로 만들겠지.
그리고 자신의 몫을 단단히 챙기리라.
참고로 삼십육계에서 나오는 혼수모어(混水摸魚)와 관련된 고사는, 유비가 주유를 속이고 남군(南郡)을 차지한 내용이다. 적벽대전 이후 주유가 조인(曹仁)을 패퇴시킨 사이, 뻔뻔하게 남군(南郡)을 취한 유비의 이야기. 이것과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혼수모어란 호칭은 참으로 적절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