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과 그의 시대]: 독립운동가 김규식 평전
본문
저자 - 정병준
출판사 - 돌베개
쪽수 - 520쪽, 552쪽, 800쪽 (각 권)
가격 - 31,500원, 31,500원, 45,000원 (각 권)
독보적인 한국현대사 연구자 정병준의 필생 노작
“김규식의 일생을 다룬다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 한국 독립운동사의 주요 쟁점과 활동을 다루는 것과 같았다. 한마디로 평생 공부한 바를 총정리하는 것이다. 김규식의 평전을 쓴다는 것은 일생의 도전과 같은 일이었다. 그만큼의 연구와 공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글〉 중에서)
그리고 마침내 한국출판문화상 학술 저술 부문을 두 차례 수상한(2006년 『한국전쟁』, 2015년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정병준 교수가 해방 80주년을 맞아 『김규식과 그의 시대』(전 3권)를 출간했다. “한 장의 사진과 조각난 글자의 흔적을 찾아 세계를 떠돌고, 역사의 편린과 모자이크를 맞추기 위해 온종일 촬영하고 복사하고 스캐닝하고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는” 역사학자의 커다란 정성과 수고와 노동을 담아낸 필생의 노작(勞作)이다. 총 1872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치밀하고 촘촘하게 구성된 본문, 각 권에 빼곡하게 실린 부록, 참고문헌, 표ㆍ그림, 색인을 보면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저자가 흘린 땀과 발품의 폭과 깊이를 여실히 알 수 있다(이 책의 백미인 3권 말미의 〈남은 말: 김규식 자료 추적기〉에서 저자는 마치 ‘역사 탐정’처럼 자료들을 집요하게 수집한 경위와 이를 접한 후의 감동과 함께 1~3권의 핵심 내용들을 정리했다).
고아 소년 “존”이 3·1운동을 촉발하고
전 세계를 누비는 독립운동가가 되기까지,
처음으로 발굴된 자료들로 다시 쓴 인간 김규식의 모든 이야기
각 권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권: 미국인 선교사의 고아원에서 자란 유년기, 조선 역사상 거의 최초의 미국대학 유학생이자 장학생, 조선 복귀 후 YMCA 등에서의 선교 활동과 전방위적 학문 활동, 중국 망명과 독립운동 투신
2권: 3.1운동의 하나의 기폭제가 된 〈파리강화회의〉 참석(친미 외교), ‘한국통신국’의 1인 외교 투쟁, 구미위원부에서의 이승만과의 만남과 큰 갈등, 뇌종양 수술
3권: 러시아에서의 〈극동민족대회〉 활동과 좌절(친소 외교), 임정 탈퇴, 중국인들과의 연대 반일 운동, 중국대학 교수 생활, 방미 독립운동 자금 모금, 민족혁명당 가입과 임정 복귀 및 부주석 역임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미국 선교사의 고아원학교에서 “존” 또는 “본갑이”로 불렸던 한 소년이 탁월한 어학 능력을 바탕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의 중견 리더로 자리를 잡다가 시대의 흐름을 타고 큰 뜻을 품어 중국으로 망명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일본의 방해에도 전 세계로 진출해 한국의 독립을 부르짖고 설득한다. 특히 1919년의 〈파리강화회의〉에서 단기필마 1인 외교로 한국통신국을 설립하고 운영함으로써 3·1운동의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던 그의 행보는 한국근현대사 속 ‘외교’의 빛나는 순간이었다.
또한 중국인들과 연대하여 반일 운동을 전개하고, 사상·이념·정파에 유연하게 대응하며 독립운동의 대의를 중심으로 통일전선적 활동을 이어 나간다. 극단으로 기울지 않았기에(단 하나의 예외적인 경우는 1920년대 초반의 ‘극동민족대회’일 것이다) 때로는 ‘중심’에서 배제되었고, 활동에 제약이 생기기도 했지만(예를 들어, 화려한 직함과는 달리 1940년대 그의 ‘임정 부주석’ 지위에는 그만한 실권이 따르지 못했다), 투쟁의 길에서는 결코 이탈하지 않았다.
이러한 독특한 특성으로 인해 명성에 비해 그의 진면목과 활동들은 제대로 발굴되지 못한 부분들이 많았다. 해방 이후 5년간의 활동은 그나마 알려져 있지만, 그의 출생과 성장, 간고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은 많은 부분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김규식과 그의 시대』는 단순한 기존 문헌 연구 분석을 훨씬 뛰어넘어 ‘인간 김규식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하게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여 공개하고, ‘그의 시대’에 관해서도 종합적으로 정리함으로써, ‘그’와 ‘그의 시대’의 성취와 한계, 명과 암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온전한 역사의 진실을 채워냈으며 수많은 추후 연구 과제들을 파생시켰다. 말 그대로 인간 김규식에 관한 기록 평전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 논픽션이며, 한국근현대사의 여러 쟁점과 연구 과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제시하는 묵직한 학술서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김규식 연구에서는
들을 수 없던 이야기들, 볼 수 없던 사진들
1권은 1881년 출생과 가계부터 중국 망명 후 3·1운동 발발 직전인 1918년까지를 대상으로 했다. 가계, 가족관계, 언더우드 고아원학교, 미국 유학, 귀국 후 국내 사회 활동, 결혼, 1913년 중국 망명 후의 활동 등을 다루었다. 이 시기 김규식의 삶을 복기하고 추적하는 일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부스러기 자료를 따라서 그의 삶을 재구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1권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기성의 김규식 연구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었고, 볼 수 없었던 내용이다〔김규식의 친아버지 선략장군 김용원(김지성)의 생애, 김규식의 언더우드 고아원 이름 ‘존’ 또는 ‘본갑이’의 연원, 김규식과 언더우드의 실질적 관계, 김규식의 로녹대학 학창 시절의 세부 활동 및 성적, 평판, 미국 유학 시절 의화군과의 관계, 귀국 후 YMCA 지도자부터 한글학자에 이르는 전방위적 근대 지식인으로써의 김규식의 면모, 김규식의 중국 망명 초기 독립운동 등〕.
김규식은 흔히 당대 식민지 한국인(조선인)들과 변별되는 성향과 성격의 근대적 인물로 이해되지만(그러한 측면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구한말 쇠잔한 나라의 국민으로 아버지 때부터 연결되어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던 조선왕조로부터의 영향을 받은 입체적 인물이었다. 김규식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전 38년 동안의 수많은 사건들은, 그 이후의 김규식을 예비했다. 그의 중국 망명. 3ㆍ1운동 이전부터 준비되던 독립운동 세력의 민주주의 지향 〈대동단결선언〉 준비 및 동제사 조직 동참 등의 사건이 그의 삶에서 돌발적이지 않은 이유다.
저자는 본문을 완성한 후 2025년 초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김규식의 어린 시절 사진들과 이를 그곳에 매각한 헐버트 선교사의 문서들을 마침내 찾아내 제1권의 서장을 썼다. (선교사들에 의해 ‘연출’된) 스미소니언박물관의 사진 이야기는, 사실상 김규식의 일생을 상징한다.
“김규식의 일생을 다룬다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 한국 독립운동사의 주요 쟁점과 활동을 다루는 것과 같았다. 한마디로 평생 공부한 바를 총정리하는 것이다. 김규식의 평전을 쓴다는 것은 일생의 도전과 같은 일이었다. 그만큼의 연구와 공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글〉 중에서)
그리고 마침내 한국출판문화상 학술 저술 부문을 두 차례 수상한(2006년 『한국전쟁』, 2015년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정병준 교수가 해방 80주년을 맞아 『김규식과 그의 시대』(전 3권)를 출간했다. “한 장의 사진과 조각난 글자의 흔적을 찾아 세계를 떠돌고, 역사의 편린과 모자이크를 맞추기 위해 온종일 촬영하고 복사하고 스캐닝하고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는” 역사학자의 커다란 정성과 수고와 노동을 담아낸 필생의 노작(勞作)이다. 총 1872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치밀하고 촘촘하게 구성된 본문, 각 권에 빼곡하게 실린 부록, 참고문헌, 표ㆍ그림, 색인을 보면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저자가 흘린 땀과 발품의 폭과 깊이를 여실히 알 수 있다(이 책의 백미인 3권 말미의 〈남은 말: 김규식 자료 추적기〉에서 저자는 마치 ‘역사 탐정’처럼 자료들을 집요하게 수집한 경위와 이를 접한 후의 감동과 함께 1~3권의 핵심 내용들을 정리했다).
고아 소년 “존”이 3·1운동을 촉발하고
전 세계를 누비는 독립운동가가 되기까지,
처음으로 발굴된 자료들로 다시 쓴 인간 김규식의 모든 이야기
각 권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권: 미국인 선교사의 고아원에서 자란 유년기, 조선 역사상 거의 최초의 미국대학 유학생이자 장학생, 조선 복귀 후 YMCA 등에서의 선교 활동과 전방위적 학문 활동, 중국 망명과 독립운동 투신
2권: 3.1운동의 하나의 기폭제가 된 〈파리강화회의〉 참석(친미 외교), ‘한국통신국’의 1인 외교 투쟁, 구미위원부에서의 이승만과의 만남과 큰 갈등, 뇌종양 수술
3권: 러시아에서의 〈극동민족대회〉 활동과 좌절(친소 외교), 임정 탈퇴, 중국인들과의 연대 반일 운동, 중국대학 교수 생활, 방미 독립운동 자금 모금, 민족혁명당 가입과 임정 복귀 및 부주석 역임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미국 선교사의 고아원학교에서 “존” 또는 “본갑이”로 불렸던 한 소년이 탁월한 어학 능력을 바탕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사회의 중견 리더로 자리를 잡다가 시대의 흐름을 타고 큰 뜻을 품어 중국으로 망명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일본의 방해에도 전 세계로 진출해 한국의 독립을 부르짖고 설득한다. 특히 1919년의 〈파리강화회의〉에서 단기필마 1인 외교로 한국통신국을 설립하고 운영함으로써 3·1운동의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던 그의 행보는 한국근현대사 속 ‘외교’의 빛나는 순간이었다.
또한 중국인들과 연대하여 반일 운동을 전개하고, 사상·이념·정파에 유연하게 대응하며 독립운동의 대의를 중심으로 통일전선적 활동을 이어 나간다. 극단으로 기울지 않았기에(단 하나의 예외적인 경우는 1920년대 초반의 ‘극동민족대회’일 것이다) 때로는 ‘중심’에서 배제되었고, 활동에 제약이 생기기도 했지만(예를 들어, 화려한 직함과는 달리 1940년대 그의 ‘임정 부주석’ 지위에는 그만한 실권이 따르지 못했다), 투쟁의 길에서는 결코 이탈하지 않았다.
이러한 독특한 특성으로 인해 명성에 비해 그의 진면목과 활동들은 제대로 발굴되지 못한 부분들이 많았다. 해방 이후 5년간의 활동은 그나마 알려져 있지만, 그의 출생과 성장, 간고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은 많은 부분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김규식과 그의 시대』는 단순한 기존 문헌 연구 분석을 훨씬 뛰어넘어 ‘인간 김규식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하게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여 공개하고, ‘그의 시대’에 관해서도 종합적으로 정리함으로써, ‘그’와 ‘그의 시대’의 성취와 한계, 명과 암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온전한 역사의 진실을 채워냈으며 수많은 추후 연구 과제들을 파생시켰다. 말 그대로 인간 김규식에 관한 기록 평전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 논픽션이며, 한국근현대사의 여러 쟁점과 연구 과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제시하는 묵직한 학술서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김규식 연구에서는
들을 수 없던 이야기들, 볼 수 없던 사진들
1권은 1881년 출생과 가계부터 중국 망명 후 3·1운동 발발 직전인 1918년까지를 대상으로 했다. 가계, 가족관계, 언더우드 고아원학교, 미국 유학, 귀국 후 국내 사회 활동, 결혼, 1913년 중국 망명 후의 활동 등을 다루었다. 이 시기 김규식의 삶을 복기하고 추적하는 일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부스러기 자료를 따라서 그의 삶을 재구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1권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기성의 김규식 연구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었고, 볼 수 없었던 내용이다〔김규식의 친아버지 선략장군 김용원(김지성)의 생애, 김규식의 언더우드 고아원 이름 ‘존’ 또는 ‘본갑이’의 연원, 김규식과 언더우드의 실질적 관계, 김규식의 로녹대학 학창 시절의 세부 활동 및 성적, 평판, 미국 유학 시절 의화군과의 관계, 귀국 후 YMCA 지도자부터 한글학자에 이르는 전방위적 근대 지식인으로써의 김규식의 면모, 김규식의 중국 망명 초기 독립운동 등〕.
김규식은 흔히 당대 식민지 한국인(조선인)들과 변별되는 성향과 성격의 근대적 인물로 이해되지만(그러한 측면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구한말 쇠잔한 나라의 국민으로 아버지 때부터 연결되어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던 조선왕조로부터의 영향을 받은 입체적 인물이었다. 김규식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전 38년 동안의 수많은 사건들은, 그 이후의 김규식을 예비했다. 그의 중국 망명. 3ㆍ1운동 이전부터 준비되던 독립운동 세력의 민주주의 지향 〈대동단결선언〉 준비 및 동제사 조직 동참 등의 사건이 그의 삶에서 돌발적이지 않은 이유다.
저자는 본문을 완성한 후 2025년 초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김규식의 어린 시절 사진들과 이를 그곳에 매각한 헐버트 선교사의 문서들을 마침내 찾아내 제1권의 서장을 썼다. (선교사들에 의해 ‘연출’된) 스미소니언박물관의 사진 이야기는, 사실상 김규식의 일생을 상징한다.
2권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 1920~1921년 구미위원부 활동, 1921년 상해 귀환 등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대표하는 3·1운동기를 다루었다. 김규식의 일생 중 가장 빛나는 시기이자, 그가 한국근현대사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한 시기였다. 김규식 일생 중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시기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 전후, 1945~1948년 해방 직후였다. 제1차 대전 이후와 제2차 대전 이후인 것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세계인이었던 그의 독특한 특성을 잘 보여주는 지점이다. 신진(여운형)-중견(김규식) 독립운동가들의 공동 투쟁으로 성사된 벼락정당 ‘신한청년당’의 파리강화회의 한국 대표 파견, 그리고 이후 파리에서의 김규식의 한국통신국 설립, 「통신전」 발행 등 단독 외교 투쟁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것보다 훨씬 큰 ‘대내적’ 파급력을 지녔던 것으로, 3·1운동의 불씨 중 하나로까지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당대 독립운동 주체들에게 힘을 불어넣는 목표지점이자 성과지점이었던 것이다. 2권에서는 김규식과 여운형이 신한청년당을 통해 〈파리강화회의〉 참가를 도모하고, 김규식이 파리에서 투쟁한 내용, 이것의 의의와 영향력을 상세하게 살폈다(프롤로그~5장).
그러나 이러한 그의 왕성한 활동은 구미위원부(재미한인 조직)에서 그의 명성만을 이용하려고 했던 야심가 이승만과의 충돌 속에서 힘을 잃고, 대미 대서방 외교 노선의 난망한 ‘실질적’ 결과는(파리강화회의 및 워싱턴회의에서 드러난 패권과 강대국을 건드리지 않는 ‘민족자결주의’의 한계) 그를 새로운 세력 소련(러시아)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민족의 운명이 좌우되고, 결정되는 중요한 시기, 김규식은 병마와 싸우면서도(1920년 뇌종양 수술) 중요한 역할을 자임했고 인생의 향배를 결정했다. 3년에 불과한 시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이유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왕성한 활동은 구미위원부(재미한인 조직)에서 그의 명성만을 이용하려고 했던 야심가 이승만과의 충돌 속에서 힘을 잃고, 대미 대서방 외교 노선의 난망한 ‘실질적’ 결과는(파리강화회의 및 워싱턴회의에서 드러난 패권과 강대국을 건드리지 않는 ‘민족자결주의’의 한계) 그를 새로운 세력 소련(러시아)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민족의 운명이 좌우되고, 결정되는 중요한 시기, 김규식은 병마와 싸우면서도(1920년 뇌종양 수술) 중요한 역할을 자임했고 인생의 향배를 결정했다. 3년에 불과한 시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이유다.
3권은 1921년말부터 1945년까지에 이르는 김규식의 중국에서의 활동을 다루었다. 1921~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와 1923년 국민대표회의의 실패, 온축과 정돈의 시기 이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1933년 도미 외교, 1935년 민족혁명당 참가, 중국 대학교수 생활, 1943~1945년 임시정부 부주석 등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과 관련된 김규식의 활동을 다룬 것이다. 김규식은 조직을 이끄는 성향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1919년을 전후해서는 신규식 및 동제사, 여운형 및 신한청년당과 연계했고) 1920년대 초반에 소련 및 사회주의 운동 세력과 연계(특히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했고, 1930~1940년대에는 우여곡절 속에서 임시정부〔한국독립당(김구)과 민족혁명당(김원봉), 이 시기 김규식은 민혁당 소속〕와 연계하였으며, (앞 시기 중한호조사부터) 중한민중대동맹 등을 통해 중국 항일 세력과도 꾸준히 관계를 이어왔다. 그렇기에 긴 시기의 다양한 활동, 조직, 인물들을 다루게 되었고, 사실상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사를 쓰게 된 셈이 되었다.
특히 제3권은 김규식뿐만 아니라 그를 이끈 시대, 시대정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다뤘다. 이 시기를 다루는 데 있어서 김구·한독당·임정 중심, 김원봉·민혁당·조선의용대 중심, 연안 독립동맹·조선의용군 중심의 설명 구도가 병립하는 기성의 연구와는 다른 접근을 시도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의 연합과 갈등, 중국국민당과의 연계, 그리고 세계정세와의 연동 등을 포괄하여 ‘빛’과 ‘그림자’를 아우르는 임시정부의 전체적이고 진실된 상을 그려보고자 하였다. 또한 1920년대 초반 김규식이 외교독립노선의 방향타를 소련(러시아)으로 돌리고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와 블라디보스토크 국민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일들이나, 1930년대 초반 ‘문제적 인물’ 한길수(리한)에게 준 위임장과 그와의 관계 등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주목받아야 할 사실들 역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또한 3권에는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권 전체를 총괄하는 역사학자의 분투기, 〈남은 말: 김규식 자료 추적기〉와 4권을 예비하는 논문(「버치 문서를 통해 본 1946~1947년 김규식의 정치 활동」)도 수록되어 있다.
해방 80년, 들리지 않았던 역사의 목소리에서 미래를 조망한다
“정치적 성패로 따지자면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역사이지만 그 삶 속에 담겨 있던 진정성과 불꽃 같은 열정의 순간들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저자의 글〉 중에서)
올해는 해방 80주년이다. 제국주의, 파시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민족해방운동이 교차했던 2차 세계대전의 향방 속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도 위치 지어졌다. 하지만 불과 수개월 전의 내란·외환 쿠데타가 보여주듯, 미완의 해방은 전쟁과 사대, 독재의 이름으로 긴 시간 여전히 우리를 옥죄어 왔다. 그리고 2025년, 미국 일극체제의 종말과 다극화라는 전후 80년 질서의 변동 양상은 또다시 우리를 거대한 시험대에 올리고 있다.
8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미완의 해방’을 말한다. 그럴수록 현재 우리의 좌표를 확인하고 역사에서 배우고자 한다면,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한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전망이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시기,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역사 현실에서 충분히 조망 받지 못하고 배제되거나 무시당했던 김규식의 헌신적이면서도 합리적이고, 독립이라는 기치 아래 국내외 모든 진영에 개방적으로 합작을 도모했으며, 세계정세의 흐름 속에서 독립운동의 위치를 연결 지어 고민했던 독특한 행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양한 발현 가능성을 지녔던 역사의 교훈에 귀를 기울일 때,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는 비로소 커다란 울림이 되고, 미래를 조망하는 지도로서 새로운 상상력의 출발점이 된다. 좌우합작과 민족단합을 통해 자주독립과 해방을 꿈꾼 동시에 동양과 서양,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미국과 중국과 소련(러시아)을 넘나들었던 진정한 세계인, 김규식에 지금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다.
특히 제3권은 김규식뿐만 아니라 그를 이끈 시대, 시대정신,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다뤘다. 이 시기를 다루는 데 있어서 김구·한독당·임정 중심, 김원봉·민혁당·조선의용대 중심, 연안 독립동맹·조선의용군 중심의 설명 구도가 병립하는 기성의 연구와는 다른 접근을 시도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의 연합과 갈등, 중국국민당과의 연계, 그리고 세계정세와의 연동 등을 포괄하여 ‘빛’과 ‘그림자’를 아우르는 임시정부의 전체적이고 진실된 상을 그려보고자 하였다. 또한 1920년대 초반 김규식이 외교독립노선의 방향타를 소련(러시아)으로 돌리고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와 블라디보스토크 국민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일들이나, 1930년대 초반 ‘문제적 인물’ 한길수(리한)에게 준 위임장과 그와의 관계 등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주목받아야 할 사실들 역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또한 3권에는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권 전체를 총괄하는 역사학자의 분투기, 〈남은 말: 김규식 자료 추적기〉와 4권을 예비하는 논문(「버치 문서를 통해 본 1946~1947년 김규식의 정치 활동」)도 수록되어 있다.
해방 80년, 들리지 않았던 역사의 목소리에서 미래를 조망한다
“정치적 성패로 따지자면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역사이지만 그 삶 속에 담겨 있던 진정성과 불꽃 같은 열정의 순간들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저자의 글〉 중에서)
올해는 해방 80주년이다. 제국주의, 파시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민족해방운동이 교차했던 2차 세계대전의 향방 속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도 위치 지어졌다. 하지만 불과 수개월 전의 내란·외환 쿠데타가 보여주듯, 미완의 해방은 전쟁과 사대, 독재의 이름으로 긴 시간 여전히 우리를 옥죄어 왔다. 그리고 2025년, 미국 일극체제의 종말과 다극화라는 전후 80년 질서의 변동 양상은 또다시 우리를 거대한 시험대에 올리고 있다.
8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미완의 해방’을 말한다. 그럴수록 현재 우리의 좌표를 확인하고 역사에서 배우고자 한다면,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한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전망이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시기,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역사 현실에서 충분히 조망 받지 못하고 배제되거나 무시당했던 김규식의 헌신적이면서도 합리적이고, 독립이라는 기치 아래 국내외 모든 진영에 개방적으로 합작을 도모했으며, 세계정세의 흐름 속에서 독립운동의 위치를 연결 지어 고민했던 독특한 행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양한 발현 가능성을 지녔던 역사의 교훈에 귀를 기울일 때,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는 비로소 커다란 울림이 되고, 미래를 조망하는 지도로서 새로운 상상력의 출발점이 된다. 좌우합작과 민족단합을 통해 자주독립과 해방을 꿈꾼 동시에 동양과 서양,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미국과 중국과 소련(러시아)을 넘나들었던 진정한 세계인, 김규식에 지금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다.
목 차
1권
저자의 글
서장 스미소니언박물관 사진이 전하는 140년 전의 김규식 이야기
1 양반집 도련님, 언더우드 목사의 “존”(John)
2 선교팸플릿의 한국 소년(Korean Boy)
3 일본 엽서의 동자(童子)
4 스미소니언아카이브의 헐버트컬렉션
1장 김규식의 부친 김용원의 생애와 김규식의 언더우드 고아원 시절
1 버려진 병약한 어린아이 “본갑이”
2 김용원 혹은 김지성의 가계
3 도화서 화원 김용원의 일본 수신사 동행
4 “선략장군” 김용원의 일본 유학
(1) 경상좌도 우후ㆍ유리제조소 설립(1880)
(2) 조사시찰단ㆍ일본 유학(1881~1883)
5 대러 외교 밀사 김용원의 최후
(1) 귀국 후 활동: 촬영국ㆍ순화국 개설(1883)
(2) 대러 외교 밀사행(1884~1885)
6 언더우드 고아원에서 생존과 영어를 배운 김규식
2장 16살에 떠난 도미 유학: 의화군과의 관계
1 의화군의 일본 체류와 도미 유학
2 요코하마에 도착한 김규식과 언더우드·박윤규
3 의화군과 김규식의 미국 유학행
3장 로녹대학 시절: 새로운 세계, 평생의 친구를 만나다(1897~1903)
1 로녹대학의 한국 학생들
2 김규식의 학창 시절(1): 학업
3 김규식의 학창 시절(2): 주미공사관·의화군과의 관계
4 김규식의 학창 시절(3): 글쓰기와 토론, 졸업
4장 국내에서의 김규식(1904~1913)
1 YMCA 이사, 서기
2 흥화학교·경신학교 교사
3 미스터리한 도미 외교 시도(1905)
4 조은애와 결혼(1906)
5 한국 기독교회의 젊은 지도자
6 계몽·문화단체 지도자, 한글학자
5장 망명의 세월(1): 중국 망명 직후의 김규식(1913)
1 1913년 4월 2일 ‘오스트레일리아’로 출국
2 남경·상해 동제사 참가
3 제2차 중국혁명 참가(1913. 7)
4 세 차례 도미 유학생을 파견하다(1913)
5 상해·서울·샌프란시스코의 연계망
6장 망명의 세월(2): 중국에서의 김규식(1914~1918)
1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북경·의주·고륜으로의 여정(1914)
(1) 북경에서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2) 외몽고 고륜행과 유동열ㆍ이태준ㆍ서왈보와의 사관학교 설립 계획
(3) 배일 비밀기관부의 ‘김만호’ 394
2 신한혁명당과 망명정부 수립 계획(1915)
3 대동단결선언과 공화주의·임시정부 수립 노선(1917)
(1) 대동단결선언과 임시정부 수립 노선
(2) 김규식의 참여와 그 의미
4 장가구와 고륜에서의 생활(1916~1918)
(1) 장가구ㆍ고륜에서의 외국상사 생활
(2) 첫 부인과의 짧은 재회ㆍ영원한 이별
에필로그
부록: 김규식 자필 이력서(1950.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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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 김규식과 그의 시대 2
: 3ㆍ1운동의 빛, 한반도를 비추다(1919~1921)
저자의 글
프롤로그: 여운형과 김규식, 3·1운동의 문을 열다
1장 여운형·크레인 면담의 연쇄: 신한청년당 결성, 윌슨 대통령 청원서, 파리강화회의 특사 파견의 3중주(1918)
1 ‘윌슨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의 상해 방문
2 여운형과 크레인의 만남(1918. 11. 27)
3 여운형과 장덕수가 작성한 청원서의 내막
4 여운형-크레인 편지(1918. 11. 29)와 윌슨 대통령 앞 청원서(1918. 11. 28)
2장 한국인들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시도와 3·1운동
1 한국과 세계 약소국가들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시도
(1) 한국인들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시도
(2) 식민지ㆍ약소국들의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기대와 대표 파견
2 국내외 한인들의 세계대전·파리강화회의 인식
(1)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제1차 세계대전ㆍ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인식
(2) 국내의 파리강화회의 인식
3 벼락정당 신한청년당 창당과 김규식 이사장
(1) 신한청년당 창당과 김규식 이사장
(2) 신한청년당의 조직과 당원들
(3) 상해 독립운동 세력의 세대 교체와 신한청년당의 사상적 지향
3장 파리로 가는 김규식, 알려지지 않은 행적
1 김규식의 중국 내 행적(1918. 12~1919. 1)
(1) 박용만에게 쓴 편지(1918. 12. 10. 천진)
(2) 북경 주재 미국공사에게 보낸 청원서(1919. 1. 북경)
(3) 윌슨 대통령에게 쓴 독립 청원 편지(1919. 1. 25. 상해)
(4) 신규식의 전한족대표위원회 소집 요구(1919. 2. 9. 상해)
(5) 신규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전한족대표위원회 개최 요구(1919. 2. 8)
2 포르토스호의 김규식, 파리강화회의 청원서 초안을 준비
3 김규식의 부동(浮動)하는 대표성
(1) 갈등하는 두 가지 대표성
(2) 재중 한국 독립운동의 세력 교체, 노선 변화
4장 국내외로 파견된 신한청년당 밀사들
1 신한청년당과 동제사의 관계
2 국내외로 파견된 신한청년당의 밀사들
(1) 간도ㆍ연해주로 간 여운형
(2) 일본으로 파견된 장덕수
(3) 중국과 일본을 왕복한 이광수
(4) 국내로 잠입한 선우혁ㆍ김철ㆍ서병호ㆍ김순애
3 3·1운동 이후의 신한청년당
4 3·1운동의 빛이 한반도에 비치다
5장 파리강화회의의 유일한 한국대표 김규식의 외교ㆍ선전활동
1 파리 도착 직후 제출한 청원서들
(1) 이욱영의 하숙집에서 작성된 청원서들(1919. 3. 20~1919. 4. 14)
(2) 파리위원부 사람들
2 외로운 파리강화회의 외교
(1) 공식 청원서ㆍ비망록의 작성과 제출(1919. 5. 10)
(2) 미국대표단과의 접촉 시도(1919. 5~1919. 6)
3 파리에서의 선전 활동
(1) 통신국과 「통신전」의 간행
(2) 다양한 선전ㆍ연대 활동
6장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의 시련의 1년 반(1919. 8~1921. 1)
1 파리를 떠나 워싱턴으로
2 대통령 이승만과 공채표 판매 세일즈맨 김규식
3 뇌종양 수술과 구미위원부 위원장이라는 고경(苦境)
(1) 애국금과 공채금의 병행
(2) 애국금 폐지ㆍ김규식의 뇌수술(1920. 3)ㆍ북미 순회
4 파열(破裂): 이승만과의 결별
7장 상해로 돌아가는 험난한 길(1921)
1 미 육군 수송함 토머스호 밀항 실패
2 밀항 시도가 남긴 기록
3 호주를 거쳐 상해로 귀환
8장 상해로 돌아온 김규식,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
1 상해로의 귀환, 이승만과의 충돌, 임정 사직
(1) 김규식의 상해 귀환, 학무총장 참여
(2) 이승만의 사퇴 문제와 김규식-이승만의 갈등
(3) 김규식의 구미위원부 위원장 사임과 구미위원부의 파란
(4) 이승만ㆍ이동휘ㆍ안창호, 임정을 떠나다
2 새로운 세 가지 방향: 국민대표회의ㆍ중한호조사ㆍ극동민족대회
(1)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김규식의 길
(2) 국민대표회의 추진
(3) 김규식과 중한호조사
(4) 워싱턴회의와 극동민족대회의 갈림길
부록: 신규식이 안창호에게 보낸 전한족대표위원회 개최 요구 편지(1919. 2. 8), 김규식이 김순애에게 보낸 편지 및 청원서 초안(스리랑카 콜롬보, 1919. 2. 25), 「해방을 위한 한국 국민의 호소를 담은 비망록」의 변화 과정, 구미위원부 수지결산(1919.9~1921.11) 및 김규식 관련 지출, 구미위원부 봉급 및 해외 각 기관 지출표, 김규식이 미 육군 수송함 토머스호 밀항 시 소지하고 있던 중요 문서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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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 저자의 글
1장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참가와 모스크바 외교(1921~1922)
1 상해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형극의 여정
(1) 상해·천진·북경·장가구·고비사막·고륜·캬흐타·베르흐네우딘스크·이르쿠츠크·모스크바의 여정
(2) 고륜에서 마주한 이태준의 죽음과 사촌여동생 김은식
2 모스크바대회와 한국대표단장 김규식
(1)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로
(2) 모스크바대회 주석단에 오른 한국대표단의 김규식·여운형
(3) 한국대표단장 김규식의 연설과 한국 문제 보고서
(4) 극동민족대회의 유산: 김규식-러시아 밀약설
3 모스크바에서의 분열: 외교교섭단, 상해파 고려공산당, 임시정부의 3각 외교전
(1) 극동민족대회 한국대표단의 외교교섭단 단장 김규식
(2)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임정의 모스크바 외교 3파전
(3) 레닌자금을 둘러싼 상해파, 이르쿠츠크파의 극한 대결
(4) 임정 특사단의 모스크바 외교전 참가와 김규식에 대한 악평
(5) 코민테른의 자금 지원 중단 결정
2장 국민대표회의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위원 김규식(1923)
1 국민대표회의의 동력: 한형권의 20만 루블
(1)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대결
(2) 레닌자금 20만 루블의 사용처
(3) 중한호조사와 교육사업의 김규식
2 국민대표회의의 경과: 창조파 정부 수립이라는 결말
(1) 국민대표회의의 개막과 참가자
(2) 창조파와 개조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
(3) 창조파의 ‘한’(韓) 정부, 국민위원회의 설립
3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몇 개월: 국민위원 김규식
(1) 정부가 아닌 혁명정당 ‘국민위원회’
(2) 국민위원회의 혁명정당 강령 초안
(3) 국민위원회에 대한 반대파의 공격
(4) 국민위원회 총회와 종막
(5) 박용만 제명 미스터리
3장 생업에 돌아가 일상을 돌보다(1923~1932)
1 상해 남화학원·고등보수학원·삼일공학의 교육자(1923~1925)
2 상해 혜령영문교·복단대학 교수, 5·30운동, 북벌 참가(1922~1928)
(1) 혜령영문교·복단대학 교수
(2) 일본 경찰과 영국 경찰의 체포 시도
(3) 국민당 북벌 참가(1927)
3 천진에서의 일상(1928~1933)
4장 또 한 번의 도미 외교 시도(1933)
1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해 독립운동 진영의 재편(1932)
2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중한민중대동맹의 결성(1932)
(1) 한국 측 통일전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창립(1932. 11)
(2) 중한연대를 위한 중한민중대동맹의 결성(1932. 11)
3 김규식의 도미와 재미한인사회의 실정(1933)
(1)『원동정세』의 정세관
(2) 대공황기 재미한인사회의 실정
4 김규식의 미주 여정과 주요 활동: 분열을 품은 통일
(1) 캘리포니아에서의 일정: 중한동맹 지부 결성 실패와 대한독립당 조직(1933. 3. 10~1933. 5. 16)
(2) 중부·동부에서의 일정: 중한민중동맹·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뉴욕지부의 결성(1933. 5. 17~1933. 7. 7)
(3) 하와이에서의 활동: 이용직·한길수와의 연결
5장 실의와 온축의 10년(1933~1942): 임시정부·민족혁명당 합류와 탈퇴, 사천대학 교수 시절
1 김규식의 임시정부 재합류(1933~1935)
2 1930년대 중국국민당정부의 후원과 임시정부·민족혁명당의 양립
3 민족혁명당의 결성, 김규식의 참여와 사직(1935)
(1) 대일전선통일동맹의 해체와 민족혁명당 결성
(2) 김규식의 민족혁명당 “사직”
4 온축의 사천대학 교수 시절(1935~1942)
(1) 영문학 교수 생활과 저술
(2) 화상마 찻집, 죽근탄 감귤원의 김우사
6장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대결(1937~1942)
1 중일전쟁과 광복진선·민족전선의 분립(1937)
(1) 광복진선과 민족전선의 분립
(2) 기강7당회의·5당회의의 결렬
2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의 분립
(1) 조선의용대의 창설과 북상
(2) 한국광복군의 창설
3 한독당·민혁당 통합 실패와 군대·의회·정부의 통일(1942)
(1) 중국국민당정부의 광복군·의용대 통합 결정
(2) 한독당과 민혁당의 통합 시도
(3)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의 확대 개편
7장 중경 임시정부의 김규식(1943~1945)
1 김원봉·민족혁명당과 한길수·재미한인사회의 연계(1941~1942)
(1) 김규식과 문제적 인물 한길수의 관계
(2) 김원봉과 한길수·민족혁명당 미주지부의 연계
2 신탁통치 문제의 대두와 한독당·민혁당의 갈등(1943)
(1) 한반도 신탁통치론의 대두와 국제공관·국제공영·국제감호설(1942~1943)
(2) 1943년 카이로회담·카이로선언의 이중적 의미
(3) 광복군 행동준승 9개조와 중국정부 지원금의 연계
(4) 중국지원금을 둘러싼 갈등: ‘암살단 사건’과 ‘공금횡령’의 대결
(5) 갈등의 안팎: 생계 문제와 정치 갈등, 중국 지원통로의 불통일
3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1944)
4 중경과 미주의 연계·갈등·분열(1941~1945)
(1) 의정원의 갈등: 헌법 개정, 한독당의 분열, 국무위원 선임(1944)
(2) “민족통일전선적 정부”의 부주석 김규식
5 임시정부의 외교·군사·통일·연대(1945)
(1) 외교: 김규식의 1945년 샌프란시스코회의 참가 시도와 이승만의 ‘얄타밀약설’ 파란
(2) 군사: 행동준승 9개조 철폐와 광복군-OSS의 공동작전
(3) 중경 내 정당 통일 시도: 5당통일회의와 독립운동자대표대회
(4)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대: 독립동맹, 만주빨치산의 연락·연대 시도
8장 해방과 귀국의 길
1 중경에서 맞은 해방의 날
2 33년 만의 귀국길
남은 말: 김규식 자료 추적기
1 가계, 유년기, 도미 유학
(1) 미국 내셔널아카이브의 현대사 자료로부터 출발한 여정
(2) 홍천 후손들의 증언, 가계, 부친 김용원
(3) 언더우드 고아원학교
(4) 스미소니언박물관의 김규식 사진들
(5) 김규식의 신분과 신분의식
(6) 도미 유학, 의화군과의 관계
(7) 로녹대학의 기록들이 이야기하는 김규식의 대학 시절
(8) 호주로 인삼 팔러 간다며 여권 받아 중국으로 망명하다
2 3·1운동, 파리강화회의, 워싱턴 구미위원부,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국민대표회의
(1) 영국에서의 자료 조사: 김규식이 인도양 콜롬보에서 쓴 편지
(2) 미국에서의 자료 조사: 토머스호 밀항 실패가 남긴 기록
(3) 여운형이 윌슨 대통령에게 쓴 청원서 편지를 찾다
(4) 파리강화회의의 김규식: 무명의 청년에서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거듭나다
(5) 공채표 세일즈맨 김규식의 뇌수술
(6) 김규식과 여운형의 관계
(7) 김규식과 신규식, 동제사의 관계
(8) 일본에서의 자료 조사: 최정익 미스터리, 박용만 미스터리
(9) 임정과 김규식의 1차 결별: 극동민족대회
(10) 극한까지 밀고 간 국민대표회의
3 1930~1940년대 중국 시절
(1) 1932년 중한민중동맹단, 1933년 도미 외교, 한길수와의 만남
(2) 1935년 민족혁명당 참가와 탈당: 행간으로 읽은 인간관계
(3) 사천대학 교수 시절
(4) 1943년 임시정부 복귀
(5) 임시정부와 미주의 관계
(6) 카이로선언, 국제공관론과 반탁운동
(7) 해방과 귀국
4 해방 이후 김규식
부록: 「한국독립당의 정강 급 쁘로그람」의 성립 과정, 국민위원회 집무규정, 한국독립당 조직안
부록 논문: 버치 문서를 통해 본 1946~1947년 김규식의 정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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