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불평등]: 시간의 자유는 어떻게 특권이 되었나
본문
저자 - 가이 스탠딩
역자 - 안효상
출판사 - 창비
쪽수 - 540쪽
가격 - 28,000원 (정가)
모든 불평등 가운데 가장 최악은 시간 불평등이다!
왜 누군가는 충분한 시간의 자유를 누리고
다른 누군가는 밥벌이에 인생을 저당 잡혀야 하는가?
왜 누군가는 충분한 시간의 자유를 누리고
다른 누군가는 밥벌이에 인생을 저당 잡혀야 하는가?
‘프레카리아트’라는 새로운 사회 계급 개념을 정립하고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에 맞서는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대안으로 기본소득을 주창해온 선구적인 정치경제학자 가이 스탠딩의 신작 『시간 불평등』이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시간 불평등’이 만연한 현실과 그 역사적 전개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며 불평등을 고착 및 심화시켜온 자본주의의 역사와 메커니즘을 전면적으로 검토하고 비판한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2030년이 되면 사람들이 주당 평균 15시간만 일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2030년을 목전에 둔 현재 전세계 연 평균 노동시간은 1,800시간에 육박하며 그중 한국은 ‘장시간 노동 국가’ ‘과로 사회’ ‘일중독 사회’라는 꼬리표를 여전히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노동시간 유연화라는 명목으로 일주일에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하려는 제도적 퇴행이 시도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고 노동으로 소진된 심신을 잠깐의 오락과 휴식으로 간신히 회복하며 매일을 보낸다.
노동에 매몰된 시간 속에서 돌봄, 우정, 정치적 참여와 숙의 등의 자리는 점점 더 좁아졌다. 저자는 이렇듯 능동적인 정치적 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 배제되는 현실이 민주주의의 기반을 약화시켜 각종 불평등과 빈곤과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키기 때문에 시간 불평등이야말로 “모든 불평등 가운데 가장 최악”(5면)이라고 경고한다. 단순히 시간 불평등의 현실을 포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시간을 통치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꿰뚫어보고 그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담하고 구체적인 정치 전략까지 총망라하는 이 책은 우리의 시간과 일상이 가혹한 요구에 직면한 이때 삶의 근본적 전환을 꿈꾸는 이들에게 유의미한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2030년이 되면 사람들이 주당 평균 15시간만 일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2030년을 목전에 둔 현재 전세계 연 평균 노동시간은 1,800시간에 육박하며 그중 한국은 ‘장시간 노동 국가’ ‘과로 사회’ ‘일중독 사회’라는 꼬리표를 여전히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노동시간 유연화라는 명목으로 일주일에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하려는 제도적 퇴행이 시도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고 노동으로 소진된 심신을 잠깐의 오락과 휴식으로 간신히 회복하며 매일을 보낸다.
노동에 매몰된 시간 속에서 돌봄, 우정, 정치적 참여와 숙의 등의 자리는 점점 더 좁아졌다. 저자는 이렇듯 능동적인 정치적 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 배제되는 현실이 민주주의의 기반을 약화시켜 각종 불평등과 빈곤과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키기 때문에 시간 불평등이야말로 “모든 불평등 가운데 가장 최악”(5면)이라고 경고한다. 단순히 시간 불평등의 현실을 포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시간을 통치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꿰뚫어보고 그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담하고 구체적인 정치 전략까지 총망라하는 이 책은 우리의 시간과 일상이 가혹한 요구에 직면한 이때 삶의 근본적 전환을 꿈꾸는 이들에게 유의미한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시간은 본래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관한 우리의 빈약한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저자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현대인들은 ‘워라밸’이라는 타협적인 용어로 일로부터 삶을 지키려 하지만, 이미 오래전 아테네인들은 ‘노동’(labour)을 “가난이라는 조건에서 수행되는 고통스럽고 힘든 활동”(24면)으로 인식해 기피했다. 그들은 노동 대신 ‘일’(work)과 여가에 많은 시간을 썼다. ‘일’은 돌봄, 공부, 교육, 창조적 작업 등 “개인의 신체적·지적·정서적 질과 더불어 사회구조와 공동체 유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활동”(25면)으로 노동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일’과 ‘노동’의 구별을 강조하며 실은 노동이 우리의 시간에 필수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음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구별은 13세기의 「삼림헌장」까지 이어졌다. 취약계층이 생계나 생활수단을 모두가 공유하는 공적 자원인 공유지(commons)에 의존할 수 있음을 명시한 「삼림헌장」은 공유지를 지키고 돌보는 공유화(commoning)와 같은 ‘일’을 권장하면서 “노동을 거부할 권리와 힘”(40면)을 인정했다. 이 시기에는 빈자라 하더라도 길고 가혹한 노동으로부터 어느정도 시간을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이외에도 휴경하며 긴 축제를 벌였던 중세 유럽 농업사회의 전통이나 의무적으로 정치에 많은 시간을 헌신하게 했던 길드(중세 유럽의 상인 및 장인 조합)의 관습 등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사용했던 역사적 사례를 바탕으로 저자는 노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리기 이전의 시간 풍경을 보여준다.
노동에 잠식당한 시간
저자는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이 경제구조와 함께 변화해왔다고 말하며 노동이 본격적으로 시간에 기입된 시점을 18세기 ‘산업혁명’ 전후로 꼽는다. 그보다 일찍부터 조짐이 있었다. ‘공유화의 시대’가 공유지를 사유화하는 인클로저로 인해 막을 내렸다. 공유지에서의 몫이 사라지자 다수가 생존을 위해 반드시 노동해야 했는데, 이는 결국 자원과 생산수단을 독점한 소수에게 종속되어 그들의 부와 자유를 늘리는 일이었다. 시간은 소수에게 유리하도록 재구성되어갔다. 시계가 발명되고 극단적 분업을 옹호하는 테일러주의와 대량생산 시스템인 포드주의가 광범위하게 도입되면서 노동을 관리하기 쉬워지고 생산성 증대가 최상의 목표가 되자 대중은 장시간 노동에 익숙해졌다. 자본주의가 시간 사용 방식을 새롭게 규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변화한 시간을 저자는 ‘산업적 시간’이라고 명명하며, 이 시기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노동주의’였다고 지적한다. 노동주의란 “노동이 일하고 생계를 꾸리는 데 적절하고 바람직한 방식이라는 허위의식”(91면)으로, 자본주의가 발흥하던 시기 노동을 원하지 않았던 대중에게 이 의식을 주입하기 위해 정치적·사회적 대규모 조정이 이루어졌다. 노동이라는 새로운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자를 제도적으로 격리·처벌하고 노동자가 일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도록 사용자가 앞서 고용안정을 보장하는 입법을 추진하는 등 폭력적이고 교묘했던 조정 과정을 낱낱이 밝히면서 저자는 무엇보다 노동주의를 수용했던 사회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을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강력하게 비판한다. 임금노동을 “일과 생활의 정상적인 방식으로 보도록 훈육”(91면)되는 것에 다름 아닌 프롤레타리아트화를 반대하는 데 앞장서야 했던 좌파는 ‘노동의 존엄성’을 떠받들며 노동주의를 받아들였다. 자유롭지 않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소득의 정당한 분배, 보편적 복지를 요구하는 데 그쳐버린 좌파의 행보를 향해 저자는 “근대성이 저지른 어마어마한 역사적 실수”(100면)라고 일침을 가한다. 결국 노동주의는 자본주의와 손을 맞잡고 소수의 부를 위해 다수의 시간이 희생되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시간 불평등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끝나지 않는 노동, 부실한 휴식,
부업과 자기계발의 압박, 그럼에도 불안정한 미래
더욱 나빠진 시간을 살다
‘제3의 시간 체제’라고 부르는 현대에 이르러 시간이 더욱 왜곡되고 불합리해졌다. 경제성장이 최고의 정치적·경제적 목표가 되면서 고용안정성 보장은 경제성장의 적으로 간주되어 산업적 시간 시대에 비해 훨씬 많은 노동자가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일하게 되었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고 자기 기업가 정신이 새로운 표준이 되자 노동자는 스스로를 리모델링하고 재시장화해야 하는 필요에 의해 더 많이 일해야 했다. 작업장(workplace) 밖에서도 일하는 것이 당연해졌고, 한꺼번에 여러가지 일을 수행하며, 노동과 여가의 경계가 희미해져 노동시간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게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악화일로가 프레카리아트에게 더 위협적이라고 말한다. 프레카리아트는 소득을 지대나 정기적인 봉급, 비임금 특전 등이 아니라 오로지 임금노동에만 의존하며 주로 불안정한 노동을 하는 계급이다. 그들 대부분은 정해진 노동시간이나 작업장이 없고 숙련기술이 필요 없는 임시직, 단기 계약직, 심부름 노동, 플랫폼 노동 등에 동원되는데, 그런 일자리의 불확실성 때문에 그들은 안정적인 소득을 확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거의 통제할 수 없게 된다. 더 심각하게는 불필요하고 비생산적인 일에 상당한 시간을 써야 한다. 언제 주어질지 모를 일을 기다리며 시간을 때우는 ‘대기하는 일’, 국가 급여를 수급하기 위해 구직활동을 증명해야 하는 ‘구직으로서의 일’, 고용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형식적인 직업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하는 ‘훈련으로서의 일’ 등이 그렇다. 저자는 제3의 시간 체제에 나타난 새로운 노동 유형들을 제시하며 시간 착취와 불평등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이러한 경향이 부호계급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계급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고 경고한다.
일할 권리가 아니라 일하지 않을 권리를 위하여
일부 사람들은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 ‘완전고용’이라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그 주장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저자가 보기에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일자리 보장이 아니라 불안정하고 무의미한 일자리에 매달리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완전고용은 모든 사람을 전일제 노동으로 편입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사람들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까다롭지 않고, 지루하고, 임금이 형편없는 일자리”(326면)로 밀어 넣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영국의 복지 제도인 유니버설 크레디트의 조건부 복지와 워크페어(노동연계복지)가 완전고용을 목표로 “극빈이나 불안전 때문에 달리 수가 없어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자리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람들”(120면)을 이용하는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두 제도 모두 수급자가 복지급여를 받으려면 구직 활동 및 직업 훈련을 하거나 공공 일자리에서 일해야 하고, 이를 증명해야 한다. 저자는 그런 제도가 취약계층 노동자의 시간과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한다고 꼬집으며, 임시적이고 기만적인 일자리 보장 제도가 아니라 일할 권리 대신 일하지 않을 권리를 우선시하며 “모두의 시간을 존중하”(326면)는 ‘소득-분배 체제’를 정립하는 것이야말로 시간 불평등 해결에 핵심적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에서 해방된 시간을 꿈꾸는
더욱 진보적인 시간의 정치
책의 마지막 장에서 가이 스탠딩은 앞서 케인스가 낙관했던 2030년대의 시나리오를 새롭게 상상하며 다시 쓴다. “우리는 2030년대에 살고 있다”(363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은 영국의 진보 정치가 혁신적인 전환과 전복적인 정책을 통해 시간 불평등을 타개하고 자본주의적 현실을 바꾸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먼저, 모두가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시간에 대한 자유를 확보할 수 있도록 무조건적 기본소득이 지급되었다. 이 기본소득의 재원은 토지가치세와 탄소 배출 부담금 등 공유지의 착취에 매겨진 요금으로 마련되었다. 노동과 생산으로 경제성장을 평가하는 GDP 대신 시간의 질, 불평등 감소, 지속가능성을 반영한 새로운 경제지표가 도입된 것 또한 또다른 혁신이었다. 그간 일자리와 같은 지불노동에만 집착하느라 주변화되었던 돌봄노동이나 가사노동 등의 활동이 가치를 인정받아 경제 평가에 포함되었다. 이를 비롯해 “더 큰 불평등을 낳는 지대 추구 자본주의의 경향을 역전”(375면)시키는 것을 목표로 짜인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정책 로드맵은 실현 가능한 사회적 전환의 청사진을 제공하며 오늘날의 독자에게 깊은 영감을 준다.
『시간 불평등』은 부의 분배만큼이나 불평등하고 부정의한 시간의 분배가 작금의 가장 긴급하고 첨예한 문제임을 역설하며, 언제부터, 왜 다수의 시간이 노동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시간의 자유는 소수만이 누리는 특권이 되었는지 역사적으로 규명한다. 정치가 소수의 부보다 다수의 시간을 중요시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사람들이 노동이 아니라 양질의 여가와 돌봄, 정치적 숙의에 더 많은 시간을 쓴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달라질지, 전복적인 상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질문들을 거침없이 던지고 이에 답한다.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관한 우리의 빈약한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저자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현대인들은 ‘워라밸’이라는 타협적인 용어로 일로부터 삶을 지키려 하지만, 이미 오래전 아테네인들은 ‘노동’(labour)을 “가난이라는 조건에서 수행되는 고통스럽고 힘든 활동”(24면)으로 인식해 기피했다. 그들은 노동 대신 ‘일’(work)과 여가에 많은 시간을 썼다. ‘일’은 돌봄, 공부, 교육, 창조적 작업 등 “개인의 신체적·지적·정서적 질과 더불어 사회구조와 공동체 유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활동”(25면)으로 노동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일’과 ‘노동’의 구별을 강조하며 실은 노동이 우리의 시간에 필수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음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구별은 13세기의 「삼림헌장」까지 이어졌다. 취약계층이 생계나 생활수단을 모두가 공유하는 공적 자원인 공유지(commons)에 의존할 수 있음을 명시한 「삼림헌장」은 공유지를 지키고 돌보는 공유화(commoning)와 같은 ‘일’을 권장하면서 “노동을 거부할 권리와 힘”(40면)을 인정했다. 이 시기에는 빈자라 하더라도 길고 가혹한 노동으로부터 어느정도 시간을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이외에도 휴경하며 긴 축제를 벌였던 중세 유럽 농업사회의 전통이나 의무적으로 정치에 많은 시간을 헌신하게 했던 길드(중세 유럽의 상인 및 장인 조합)의 관습 등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사용했던 역사적 사례를 바탕으로 저자는 노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리기 이전의 시간 풍경을 보여준다.
노동에 잠식당한 시간
저자는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이 경제구조와 함께 변화해왔다고 말하며 노동이 본격적으로 시간에 기입된 시점을 18세기 ‘산업혁명’ 전후로 꼽는다. 그보다 일찍부터 조짐이 있었다. ‘공유화의 시대’가 공유지를 사유화하는 인클로저로 인해 막을 내렸다. 공유지에서의 몫이 사라지자 다수가 생존을 위해 반드시 노동해야 했는데, 이는 결국 자원과 생산수단을 독점한 소수에게 종속되어 그들의 부와 자유를 늘리는 일이었다. 시간은 소수에게 유리하도록 재구성되어갔다. 시계가 발명되고 극단적 분업을 옹호하는 테일러주의와 대량생산 시스템인 포드주의가 광범위하게 도입되면서 노동을 관리하기 쉬워지고 생산성 증대가 최상의 목표가 되자 대중은 장시간 노동에 익숙해졌다. 자본주의가 시간 사용 방식을 새롭게 규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변화한 시간을 저자는 ‘산업적 시간’이라고 명명하며, 이 시기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노동주의’였다고 지적한다. 노동주의란 “노동이 일하고 생계를 꾸리는 데 적절하고 바람직한 방식이라는 허위의식”(91면)으로, 자본주의가 발흥하던 시기 노동을 원하지 않았던 대중에게 이 의식을 주입하기 위해 정치적·사회적 대규모 조정이 이루어졌다. 노동이라는 새로운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자를 제도적으로 격리·처벌하고 노동자가 일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도록 사용자가 앞서 고용안정을 보장하는 입법을 추진하는 등 폭력적이고 교묘했던 조정 과정을 낱낱이 밝히면서 저자는 무엇보다 노동주의를 수용했던 사회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을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강력하게 비판한다. 임금노동을 “일과 생활의 정상적인 방식으로 보도록 훈육”(91면)되는 것에 다름 아닌 프롤레타리아트화를 반대하는 데 앞장서야 했던 좌파는 ‘노동의 존엄성’을 떠받들며 노동주의를 받아들였다. 자유롭지 않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소득의 정당한 분배, 보편적 복지를 요구하는 데 그쳐버린 좌파의 행보를 향해 저자는 “근대성이 저지른 어마어마한 역사적 실수”(100면)라고 일침을 가한다. 결국 노동주의는 자본주의와 손을 맞잡고 소수의 부를 위해 다수의 시간이 희생되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시간 불평등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끝나지 않는 노동, 부실한 휴식,
부업과 자기계발의 압박, 그럼에도 불안정한 미래
더욱 나빠진 시간을 살다
‘제3의 시간 체제’라고 부르는 현대에 이르러 시간이 더욱 왜곡되고 불합리해졌다. 경제성장이 최고의 정치적·경제적 목표가 되면서 고용안정성 보장은 경제성장의 적으로 간주되어 산업적 시간 시대에 비해 훨씬 많은 노동자가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일하게 되었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고 자기 기업가 정신이 새로운 표준이 되자 노동자는 스스로를 리모델링하고 재시장화해야 하는 필요에 의해 더 많이 일해야 했다. 작업장(workplace) 밖에서도 일하는 것이 당연해졌고, 한꺼번에 여러가지 일을 수행하며, 노동과 여가의 경계가 희미해져 노동시간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게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악화일로가 프레카리아트에게 더 위협적이라고 말한다. 프레카리아트는 소득을 지대나 정기적인 봉급, 비임금 특전 등이 아니라 오로지 임금노동에만 의존하며 주로 불안정한 노동을 하는 계급이다. 그들 대부분은 정해진 노동시간이나 작업장이 없고 숙련기술이 필요 없는 임시직, 단기 계약직, 심부름 노동, 플랫폼 노동 등에 동원되는데, 그런 일자리의 불확실성 때문에 그들은 안정적인 소득을 확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거의 통제할 수 없게 된다. 더 심각하게는 불필요하고 비생산적인 일에 상당한 시간을 써야 한다. 언제 주어질지 모를 일을 기다리며 시간을 때우는 ‘대기하는 일’, 국가 급여를 수급하기 위해 구직활동을 증명해야 하는 ‘구직으로서의 일’, 고용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형식적인 직업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하는 ‘훈련으로서의 일’ 등이 그렇다. 저자는 제3의 시간 체제에 나타난 새로운 노동 유형들을 제시하며 시간 착취와 불평등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이러한 경향이 부호계급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계급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고 경고한다.
일할 권리가 아니라 일하지 않을 권리를 위하여
일부 사람들은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 ‘완전고용’이라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그 주장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저자가 보기에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일자리 보장이 아니라 불안정하고 무의미한 일자리에 매달리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완전고용은 모든 사람을 전일제 노동으로 편입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사람들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까다롭지 않고, 지루하고, 임금이 형편없는 일자리”(326면)로 밀어 넣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영국의 복지 제도인 유니버설 크레디트의 조건부 복지와 워크페어(노동연계복지)가 완전고용을 목표로 “극빈이나 불안전 때문에 달리 수가 없어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자리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람들”(120면)을 이용하는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두 제도 모두 수급자가 복지급여를 받으려면 구직 활동 및 직업 훈련을 하거나 공공 일자리에서 일해야 하고, 이를 증명해야 한다. 저자는 그런 제도가 취약계층 노동자의 시간과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한다고 꼬집으며, 임시적이고 기만적인 일자리 보장 제도가 아니라 일할 권리 대신 일하지 않을 권리를 우선시하며 “모두의 시간을 존중하”(326면)는 ‘소득-분배 체제’를 정립하는 것이야말로 시간 불평등 해결에 핵심적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에서 해방된 시간을 꿈꾸는
더욱 진보적인 시간의 정치
책의 마지막 장에서 가이 스탠딩은 앞서 케인스가 낙관했던 2030년대의 시나리오를 새롭게 상상하며 다시 쓴다. “우리는 2030년대에 살고 있다”(363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은 영국의 진보 정치가 혁신적인 전환과 전복적인 정책을 통해 시간 불평등을 타개하고 자본주의적 현실을 바꾸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먼저, 모두가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시간에 대한 자유를 확보할 수 있도록 무조건적 기본소득이 지급되었다. 이 기본소득의 재원은 토지가치세와 탄소 배출 부담금 등 공유지의 착취에 매겨진 요금으로 마련되었다. 노동과 생산으로 경제성장을 평가하는 GDP 대신 시간의 질, 불평등 감소, 지속가능성을 반영한 새로운 경제지표가 도입된 것 또한 또다른 혁신이었다. 그간 일자리와 같은 지불노동에만 집착하느라 주변화되었던 돌봄노동이나 가사노동 등의 활동이 가치를 인정받아 경제 평가에 포함되었다. 이를 비롯해 “더 큰 불평등을 낳는 지대 추구 자본주의의 경향을 역전”(375면)시키는 것을 목표로 짜인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정책 로드맵은 실현 가능한 사회적 전환의 청사진을 제공하며 오늘날의 독자에게 깊은 영감을 준다.
『시간 불평등』은 부의 분배만큼이나 불평등하고 부정의한 시간의 분배가 작금의 가장 긴급하고 첨예한 문제임을 역설하며, 언제부터, 왜 다수의 시간이 노동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시간의 자유는 소수만이 누리는 특권이 되었는지 역사적으로 규명한다. 정치가 소수의 부보다 다수의 시간을 중요시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사람들이 노동이 아니라 양질의 여가와 돌봄, 정치적 숙의에 더 많은 시간을 쓴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달라질지, 전복적인 상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질문들을 거침없이 던지고 이에 답한다.
목 차
- 한국어판 서문
서문
1장 고대의 시간
2장 농업적 시간의 시대
3장 산업적 시간: 노동주의의 승리
4장 제3의 시간: 노동주의의 마지막 구간
5장 제3의 시간에 대한 반작용
6장 코로나바이러스의 관점에서 본 시간
7장 일자리라는 선택지: 노동주의의 최종 단계
8장 시간의 해방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주
찾아보기
추 천 사
"쉽게 다가가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책. 시간에 얽매인 이들에게 잠시나마 해방감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