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와 인간성 파괴]: 유연성은 인간의 일상을 어떻게 불안하게 만드는가
본문
저자 - 리처드 세넷
역자 - 조용
출판사 - 문예출판사
쪽수 - 240쪽
가격 - 16,000원 (정가)
* 개정판
《계급의 숨은 상처》 이후 25년
표류하는 노동 계급의 삶과 내면을 파헤치는 또 하나의 역작
★《계급의 숨은 상처》 출간 기념 개정판★
독일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라
세넷에게 ‘유럽에서 읽히는 미국인’이라는 명성을 가져다준 책
《신자유주의와 인간성 파괴》는 ‘유연한 자본주의’,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우리 삶과 내면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는지를 살피는 책이다. 에세이형 논문을 표방하는 이 사려 깊은 책에서 리처드 세넷은 개인에게 더 많은 선택과 자유를 보장하는 듯한 신자유주의에 교묘한 통치 논리가 어떤 방식으로 숨어 있는지, 이 체제하에서 인간성은 어떠한 도전을 받으며 파괴되어가는지를 인상적으로 설파한다. ‘노동 계급 하층민에게 인간의 얼굴을 되찾아준 고전’으로 평가받는 《계급의 숨은 상처》의 후속작이라 할 만한 책으로, 독일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라 세넷에게 ‘유럽에서 읽히는 미국인’이라는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세넷은 리코 이야기로 책을 시작한다. 리코는 세넷이 이 책을 쓰기 25년 전 《계급의 숨은 상처》를 집필할 때 만난 엔리코의 아들이다. 건물 수위로 일한 엔리코는 하류 계층에 속했고 똑같은 일을 평생 하며 자칫 따분해 보일 수도 있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엔리코에게는 자부심이 있었다. 자신이 자기 인생의 작가라는 자부심 말이다. 엔리코는 규칙적이고 단선적인 노동에서 자신만의 인생 스토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데 만족했다. 그러나 리코는 그럴 수 없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상위 5퍼센트의 소득을 올리는 계층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다. 쉴 새 없이 다가오는 변화에 대한 유연한 적응력, 끝없는 모험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리코가 아버지와 같은 단단한 삶의 서사를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리코는 일터에서는 불안감과 초조함에 시달리며, 가정에서는 장기적 가치가 부재하다는 데 불안해한다. 리코는 계층 상승을 이뤄낸 대가로 자기 행위에 계통을 세워주는 사건의 전말에 관한 이야기를 잃었다. 리코의 인간성은 훼손되고 있다.
드니 디드로 vs 애덤 스미스
반복되는 일상적 노동 vs 신자유주의의 ‘유연성’
세넷은 여기에 드니 디드로와 애덤 스미스의 논쟁을 더한다. 각각 1751~72년, 1766년에 출간된 《백과전서》와 《국부론》에서 디드로는 반복 작업의 미덕을 강조했고, 스미스는 고정된 일상이 정신을 마비시킨다며 변화를 예찬했다. 디드로는 배우가 그러하듯 반복되는 작업에서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이 싹트리라 믿었고, 스미스는 끝없는 변화가 초래할 도덕적 결과에는 우려를 표하면서도 그것이 경제 측면에서는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옹호했다. 주지하다시피, 현대 사회는 스미스의 편이다.
18세기의 고전을 동시대의 논쟁으로 재활성화하는 세넷은 오늘날의 ‘유연성’의 문화에서 디드로와 스미스를 사로잡은 일상과 노동의 문제가 다시금 역사적 갈림길 앞에 서 있다고 진단한다. 유연성은 원래 구부러졌다가 되돌아오는 힘 모두를 뜻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이 중 첫 번째 의미만을 취한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노동 형태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결과로 파괴되는 인간성을 복구하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조직의 비연속적 개혁, 유연 전문화, 중앙 집중이 없는 결집 등 신자유주의가 작동하는 방식과 그 특징을 명료하게 정리한 후, 세넷은 전 세계 정재계의 수뇌가 모이는 다보스 포럼에서 관찰한 것을 통해 자신의 해석에 구체적 실체를 부여한다. 빌 게이츠를 비롯한 다보스 포럼 참석자들은 무질서 속에서도 건재할 수 있는 자신감, 방향 상실 속에서도 번창할 수 있는 강인함을 상찬한다. 그리고 바로 이 능력을 기준으로 승자와 패자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 ‘진정한 승자’는 쉴 새 없는 모험과 변화 속에서도 정신적 분열로 고통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연함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논리 앞에서, 리코의 혼란은 진지한 고려 대상일 수 없다. 리코의 경제적 성취만이 공허하게 빛날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우리의 노동 서사를 뒤흔들고,
나아가 삶의 통제력을 빼앗아가는가?
소수의 특권층, 엘리트를 제외한 대다수의 노동 계급은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세넷은 보스턴의 한 빵집 이야기를 들려준다. 과거 그리스계 이민자들이 제빵사로 주로 일하던 이 빵집은 엄청나게 고된 육체노동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고된 노동은 제빵사들을 소외시키지 않았다. 제빵사라는 직업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러나 비싼 기계가 모든 제빵 과정을 대신하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제는 누구도 제빵사가 되기 위해 수년 동안 반복적인 훈육을 거칠 필요가 없다. 심지어 손에 밀가루조차 묻힐 필요가 없다. 규정된 대로 기계에 재료를 넣고, 원하는 빵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얼핏 ‘진보적’으로 보이는 이 변화의 이면이 적나라하게 폭로되는 건 기계가 고장 났을 때다. 노동자들은 기계 수리공이 올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고 가만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제빵사’였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손으로 훈련하여 얻은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제빵사로서 품위를 가질 수 없고, 정서적인 혼란과 자신이 무용하다는 느낌에 휩싸인다. 이처럼 자기 일에 대한 이해 부족은 노동의 열정을 앗아가고 일을 피상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제빵사들이 ‘유연한’ 근무 스케줄 때문에 여기저기서 일해야만 하는 상황도 사태를 악화한다.
세넷이 종종 들르던 단골 바의 사장 이야기도 같은 교훈을 전한다. 뉴욕에서 오랫동안 바를 운영해온 로즈는 문득 ‘변화’의 충동에 사로잡혔다. 계속 지금처럼 있다가는 ‘다 해진 후줄근한 양복’과 같은 신세가 될 거라는 위기감이 들어서였다. 로즈는 주류 광고 대행사의 문을 두드려 마케터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로즈는 내내 시험대에 선 기분에 혼란스러웠고, 늘상 닻도 없이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기분에 시달렸다. 무엇보다 그녀를 괴롭힌 건 그녀가 바를 운영하며 익힌 노하우가 회사에서 철저히 부정당했다는 점이었다. 중년의 로즈는 나이에서부터 이미 유연성과 대비되는 경직성의 상징으로 취급받았다. 결국 로즈는 신자유주의의 모든 특징을 집약해놓은 듯한 이 광고 대행사를 그만두고 1년 만에 자신이 운영하던 바로 돌아왔다. 로즈는 모험하지 않는 것은 곧 실패라는 우리 시대의 정언명령에 충실했지만, 그 대가는 자존감의 심각한 하락이었을 뿐이다.
로즈의 실패는 신자유주의의 노동 윤리와 관련이 있다. 보스턴의 빵집에서도 드러나듯이, 오늘날의 노동 윤리는 경험의 깊이를 위협한다. 유연한 자본주의에서 모든 업무는 팀 단위로 배정되고, ‘소통’과 ‘협업’이 일 그 자체의 위상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 경험은 노동자를 경험의 본질에 다다르지 못하게 만들고 표면에만 머물게 한다. 더불어 ‘혁신을 위한 혁신’이라는 허상을 좇으며 소통과 협업만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팀 문화는 기업에서 전통적이며 권위적인 통치자가 사라졌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도 위험하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신자유주의 팀 문화에서는 동료들 사이의 상호 감시와 압력이 전통적, 수직적 통제를 대체한다. 신자유주의가 장려하는 노동은 협력의 위장술이며 교묘한 방식으로 회사의 이익에 부응한다는 것이 세넷의 진단이다.
신자유주의의 통치 논리와
‘자책’하는 노동자의 탄생
변화하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은 자신을 엉뚱한 방향으로 다그쳐 몰아붙인다. 체제를 심문하는 대신 자아를 변화시킬 또 다른 모험을 감행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IBM에서 해고된 프로그래머들이 어떠한 심경 변화를 겪었는지에 관한 세넷의 관찰은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적 관계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1980년대 중반까지 IBM은 철저하게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방식으로 경영되며 수직적, 관료적 질서를 따랐다. 노동자들은 위에서 시키는 일을 성실히 수행했고, 회사는 그 대가로 넉넉한 임금과 폭넓은 복지를 제공했다. 그러나 IBM은 개인용 컴퓨터 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오판해 커다란 위기를 맞았고, 마이크로소프트로 대표되는 ‘유연한’ 기업의 도전에 직격탄을 맞았다. 고통스러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프로그래머들은 순차적으로 해고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해고를 회사와 상사의 음모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해고를 주도한 상사마저 해고되고, 그럴듯한 윗선의 계략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고갈되자 이들의 대화는 두 번째 국면을 맞았다. 그들은 외부의 적을 찾았다. 글로벌 경제 재편, 값싼 외국인 노동력 유입 등이 타깃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해고 원인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은 아니었다. 마침내 도래한 대화의 세 번째 국면은 ‘자책’이었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이 닥치기 전에 진작 변화를 준비했어야 했다. 회사에 의존하지 않고 창조적, 진취적으로 도전하며, 모험에 뛰어들었어야 했다. 그들은 어느새 해고를 스스로 초래한 비극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실패를 곱씹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도태가 모든 문제의 진정한 원인이라는 자책이 솟아난 것이다.
‘우리’의 범주는 새로이 구성될 수 있을까?
인간적 체제를 향한 긴요한 요청
세넷은 신자유주의적 현재를 비관하지만 무턱대고 과거를 낭만화하지는 않는다. 그가 여러 번 언급하듯, 과거의 노동 계급은 엄청나게 고된 노동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즉, 과거와 현재의 자본주의에는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신자유주의가 마침내 헤게모니를 틀어쥔 지금은 인간성 파괴의 문제가 두드러질 뿐이다. 그렇다면 이 음울한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세넷은 ‘우리’라는 대명사를 다시금 소환한다. ‘우리’는 종종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방식으로 누군가를 결집시킨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이 대명사의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채워야 할 필요성을 점차 고조시킨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인간성에 관한 모든 부정적인 효과에 대항하는 것으로서 ‘우리’를 구성할 필요성이 긴요해지는 것이다.
세넷은 단결만 강조하는 공동체주의와는 거리를 두며, 합의보다는 갈등으로 더욱 견고해지는 ‘우리’의 범주에 관한 다채로운 사유의 궤적을 훑는다. 그리하여 개개인이 더는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확신할 수 없는 지금, 어려움을 공유하는 자들의 서사를 갈무리해 펼쳐낼 필요성을 분명하게 환기한다. 한편 이는 체제의 정당성 문제이기도 하다. 세넷은 신자유주의의 모든 문제를 포괄하는 정치 프로그램이 무엇인지는 자신 역시 모른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확신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왜 우리가 인간적으로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소중한 이유를 제시해주지 못하는 체제라면, 자신의 정통성을 오래 보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정통성이야말로 바로 신자유주의의 첨병이자 전위인 다보스 포럼의 참석자들, 그리고 그들이 안착한 체제가 간과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성의 문제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그리고 악의적으로 무능하다. 파괴된 인간성의 문제를 직시하고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은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의무다.
표류하는 노동 계급의 삶과 내면을 파헤치는 또 하나의 역작
★《계급의 숨은 상처》 출간 기념 개정판★
독일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라
세넷에게 ‘유럽에서 읽히는 미국인’이라는 명성을 가져다준 책
《신자유주의와 인간성 파괴》는 ‘유연한 자본주의’,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우리 삶과 내면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는지를 살피는 책이다. 에세이형 논문을 표방하는 이 사려 깊은 책에서 리처드 세넷은 개인에게 더 많은 선택과 자유를 보장하는 듯한 신자유주의에 교묘한 통치 논리가 어떤 방식으로 숨어 있는지, 이 체제하에서 인간성은 어떠한 도전을 받으며 파괴되어가는지를 인상적으로 설파한다. ‘노동 계급 하층민에게 인간의 얼굴을 되찾아준 고전’으로 평가받는 《계급의 숨은 상처》의 후속작이라 할 만한 책으로, 독일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라 세넷에게 ‘유럽에서 읽히는 미국인’이라는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세넷은 리코 이야기로 책을 시작한다. 리코는 세넷이 이 책을 쓰기 25년 전 《계급의 숨은 상처》를 집필할 때 만난 엔리코의 아들이다. 건물 수위로 일한 엔리코는 하류 계층에 속했고 똑같은 일을 평생 하며 자칫 따분해 보일 수도 있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엔리코에게는 자부심이 있었다. 자신이 자기 인생의 작가라는 자부심 말이다. 엔리코는 규칙적이고 단선적인 노동에서 자신만의 인생 스토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데 만족했다. 그러나 리코는 그럴 수 없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상위 5퍼센트의 소득을 올리는 계층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다. 쉴 새 없이 다가오는 변화에 대한 유연한 적응력, 끝없는 모험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리코가 아버지와 같은 단단한 삶의 서사를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리코는 일터에서는 불안감과 초조함에 시달리며, 가정에서는 장기적 가치가 부재하다는 데 불안해한다. 리코는 계층 상승을 이뤄낸 대가로 자기 행위에 계통을 세워주는 사건의 전말에 관한 이야기를 잃었다. 리코의 인간성은 훼손되고 있다.
드니 디드로 vs 애덤 스미스
반복되는 일상적 노동 vs 신자유주의의 ‘유연성’
세넷은 여기에 드니 디드로와 애덤 스미스의 논쟁을 더한다. 각각 1751~72년, 1766년에 출간된 《백과전서》와 《국부론》에서 디드로는 반복 작업의 미덕을 강조했고, 스미스는 고정된 일상이 정신을 마비시킨다며 변화를 예찬했다. 디드로는 배우가 그러하듯 반복되는 작업에서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이 싹트리라 믿었고, 스미스는 끝없는 변화가 초래할 도덕적 결과에는 우려를 표하면서도 그것이 경제 측면에서는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옹호했다. 주지하다시피, 현대 사회는 스미스의 편이다.
18세기의 고전을 동시대의 논쟁으로 재활성화하는 세넷은 오늘날의 ‘유연성’의 문화에서 디드로와 스미스를 사로잡은 일상과 노동의 문제가 다시금 역사적 갈림길 앞에 서 있다고 진단한다. 유연성은 원래 구부러졌다가 되돌아오는 힘 모두를 뜻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이 중 첫 번째 의미만을 취한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노동 형태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결과로 파괴되는 인간성을 복구하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조직의 비연속적 개혁, 유연 전문화, 중앙 집중이 없는 결집 등 신자유주의가 작동하는 방식과 그 특징을 명료하게 정리한 후, 세넷은 전 세계 정재계의 수뇌가 모이는 다보스 포럼에서 관찰한 것을 통해 자신의 해석에 구체적 실체를 부여한다. 빌 게이츠를 비롯한 다보스 포럼 참석자들은 무질서 속에서도 건재할 수 있는 자신감, 방향 상실 속에서도 번창할 수 있는 강인함을 상찬한다. 그리고 바로 이 능력을 기준으로 승자와 패자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 ‘진정한 승자’는 쉴 새 없는 모험과 변화 속에서도 정신적 분열로 고통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연함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논리 앞에서, 리코의 혼란은 진지한 고려 대상일 수 없다. 리코의 경제적 성취만이 공허하게 빛날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우리의 노동 서사를 뒤흔들고,
나아가 삶의 통제력을 빼앗아가는가?
소수의 특권층, 엘리트를 제외한 대다수의 노동 계급은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세넷은 보스턴의 한 빵집 이야기를 들려준다. 과거 그리스계 이민자들이 제빵사로 주로 일하던 이 빵집은 엄청나게 고된 육체노동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고된 노동은 제빵사들을 소외시키지 않았다. 제빵사라는 직업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러나 비싼 기계가 모든 제빵 과정을 대신하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제는 누구도 제빵사가 되기 위해 수년 동안 반복적인 훈육을 거칠 필요가 없다. 심지어 손에 밀가루조차 묻힐 필요가 없다. 규정된 대로 기계에 재료를 넣고, 원하는 빵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얼핏 ‘진보적’으로 보이는 이 변화의 이면이 적나라하게 폭로되는 건 기계가 고장 났을 때다. 노동자들은 기계 수리공이 올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고 가만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제빵사’였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손으로 훈련하여 얻은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제빵사로서 품위를 가질 수 없고, 정서적인 혼란과 자신이 무용하다는 느낌에 휩싸인다. 이처럼 자기 일에 대한 이해 부족은 노동의 열정을 앗아가고 일을 피상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제빵사들이 ‘유연한’ 근무 스케줄 때문에 여기저기서 일해야만 하는 상황도 사태를 악화한다.
세넷이 종종 들르던 단골 바의 사장 이야기도 같은 교훈을 전한다. 뉴욕에서 오랫동안 바를 운영해온 로즈는 문득 ‘변화’의 충동에 사로잡혔다. 계속 지금처럼 있다가는 ‘다 해진 후줄근한 양복’과 같은 신세가 될 거라는 위기감이 들어서였다. 로즈는 주류 광고 대행사의 문을 두드려 마케터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로즈는 내내 시험대에 선 기분에 혼란스러웠고, 늘상 닻도 없이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기분에 시달렸다. 무엇보다 그녀를 괴롭힌 건 그녀가 바를 운영하며 익힌 노하우가 회사에서 철저히 부정당했다는 점이었다. 중년의 로즈는 나이에서부터 이미 유연성과 대비되는 경직성의 상징으로 취급받았다. 결국 로즈는 신자유주의의 모든 특징을 집약해놓은 듯한 이 광고 대행사를 그만두고 1년 만에 자신이 운영하던 바로 돌아왔다. 로즈는 모험하지 않는 것은 곧 실패라는 우리 시대의 정언명령에 충실했지만, 그 대가는 자존감의 심각한 하락이었을 뿐이다.
로즈의 실패는 신자유주의의 노동 윤리와 관련이 있다. 보스턴의 빵집에서도 드러나듯이, 오늘날의 노동 윤리는 경험의 깊이를 위협한다. 유연한 자본주의에서 모든 업무는 팀 단위로 배정되고, ‘소통’과 ‘협업’이 일 그 자체의 위상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 경험은 노동자를 경험의 본질에 다다르지 못하게 만들고 표면에만 머물게 한다. 더불어 ‘혁신을 위한 혁신’이라는 허상을 좇으며 소통과 협업만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팀 문화는 기업에서 전통적이며 권위적인 통치자가 사라졌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도 위험하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신자유주의 팀 문화에서는 동료들 사이의 상호 감시와 압력이 전통적, 수직적 통제를 대체한다. 신자유주의가 장려하는 노동은 협력의 위장술이며 교묘한 방식으로 회사의 이익에 부응한다는 것이 세넷의 진단이다.
신자유주의의 통치 논리와
‘자책’하는 노동자의 탄생
변화하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은 자신을 엉뚱한 방향으로 다그쳐 몰아붙인다. 체제를 심문하는 대신 자아를 변화시킬 또 다른 모험을 감행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IBM에서 해고된 프로그래머들이 어떠한 심경 변화를 겪었는지에 관한 세넷의 관찰은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적 관계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1980년대 중반까지 IBM은 철저하게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방식으로 경영되며 수직적, 관료적 질서를 따랐다. 노동자들은 위에서 시키는 일을 성실히 수행했고, 회사는 그 대가로 넉넉한 임금과 폭넓은 복지를 제공했다. 그러나 IBM은 개인용 컴퓨터 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오판해 커다란 위기를 맞았고, 마이크로소프트로 대표되는 ‘유연한’ 기업의 도전에 직격탄을 맞았다. 고통스러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프로그래머들은 순차적으로 해고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해고를 회사와 상사의 음모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해고를 주도한 상사마저 해고되고, 그럴듯한 윗선의 계략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고갈되자 이들의 대화는 두 번째 국면을 맞았다. 그들은 외부의 적을 찾았다. 글로벌 경제 재편, 값싼 외국인 노동력 유입 등이 타깃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해고 원인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은 아니었다. 마침내 도래한 대화의 세 번째 국면은 ‘자책’이었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이 닥치기 전에 진작 변화를 준비했어야 했다. 회사에 의존하지 않고 창조적, 진취적으로 도전하며, 모험에 뛰어들었어야 했다. 그들은 어느새 해고를 스스로 초래한 비극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실패를 곱씹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도태가 모든 문제의 진정한 원인이라는 자책이 솟아난 것이다.
‘우리’의 범주는 새로이 구성될 수 있을까?
인간적 체제를 향한 긴요한 요청
세넷은 신자유주의적 현재를 비관하지만 무턱대고 과거를 낭만화하지는 않는다. 그가 여러 번 언급하듯, 과거의 노동 계급은 엄청나게 고된 노동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즉, 과거와 현재의 자본주의에는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신자유주의가 마침내 헤게모니를 틀어쥔 지금은 인간성 파괴의 문제가 두드러질 뿐이다. 그렇다면 이 음울한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세넷은 ‘우리’라는 대명사를 다시금 소환한다. ‘우리’는 종종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방식으로 누군가를 결집시킨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이 대명사의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채워야 할 필요성을 점차 고조시킨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인간성에 관한 모든 부정적인 효과에 대항하는 것으로서 ‘우리’를 구성할 필요성이 긴요해지는 것이다.
세넷은 단결만 강조하는 공동체주의와는 거리를 두며, 합의보다는 갈등으로 더욱 견고해지는 ‘우리’의 범주에 관한 다채로운 사유의 궤적을 훑는다. 그리하여 개개인이 더는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확신할 수 없는 지금, 어려움을 공유하는 자들의 서사를 갈무리해 펼쳐낼 필요성을 분명하게 환기한다. 한편 이는 체제의 정당성 문제이기도 하다. 세넷은 신자유주의의 모든 문제를 포괄하는 정치 프로그램이 무엇인지는 자신 역시 모른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확신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왜 우리가 인간적으로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소중한 이유를 제시해주지 못하는 체제라면, 자신의 정통성을 오래 보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정통성이야말로 바로 신자유주의의 첨병이자 전위인 다보스 포럼의 참석자들, 그리고 그들이 안착한 체제가 간과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성의 문제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그리고 악의적으로 무능하다. 파괴된 인간성의 문제를 직시하고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은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의무다.
목 차
- 서문
표류
신자유주의적 노동에 공격받는 인간성
일상
구자본주의의 문제점
유연성
새롭게 구조 조정되는 시간
이해 불가능성
현대적 형태의 노동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
리스크
혼란과 침체를 불러오는 리스크
노동 윤리
변화되어온 노동 윤리
실패
실패에 대처하는법
우리, 그 위험한 대명사
표류하는 삶을 구조하는 수단
부록
미주
추 천 사
“폭넓은 역사적, 문학적 지식에 상점이나 공장에 들어가 대화를 시작하려는 기자의 의지가 결합된 책.”
“현대 자본주의의 유연성이 단지 새로운 형태의 억압에 불과하지는 않은지 판단할 것을 독자에게 촉구한다.”
“우리 시대의 벤치마크와도 같은 책.”
“예리한 경험적 관찰과 진지한 도덕적 성찰의 놀라운 종합.”
“파괴적이며 전적으로 필요한 책.”
관련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