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에 직각식사를 도입한 밴 플리트 장군의 승진이 누락된 슬픈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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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대장
제임스 밴 플리트는 "별들의 기수"라고 불리는 한 기수 중 가장 많은 장군을 배출한 웨스트포인트 1915년 졸업생 중 한 명이며 아이젠하워, 브래들리 원수와 동기이다. 1차 세계대전 때는 미국 유럽 원정군의 일원으로 파병되었고 자신이 파견된 모든 부대에서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전쟁에서도 자기 능력을 증명한, 뛰어난 야전 지휘 능력과 통찰력을 가진 명장이었다.
그런데... 밴 플리트가 육군보병학교 교관을 하던 시절에 미육군에는 알콜중독으로 유명한 장교가 한 명 있었는데, 이름이 밴 플리트와 비슷한데다 밴 플리트가 맡았던 고등군사반의 성적이 좋지 않아 마셜이 밴 플리트를 그 알콜중독자로 착각하게 되었다.
미군 15대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 원수
그래서 밴 플리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복무하며 주변의 추천과 우수한 전공에도 불구하고 그를 주정뱅이로 착각한 마셜이 계속 진급누락시키는 바람에 3년 넘게 진급이 막혀 있었다.
유럽전선 연합군 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원수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만 해도 대령 계급에 4보병사단 8보병연대 연대장이었던 밴플리트는 8월에 준장으로 진급해 2보병사단의 부사단장이 되었고, 곧 90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11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한다. 45년 1월에는 후방 부대인 23군단 군단장으로 부임했고 3월에는 최전방 부대인 3군단장으로 전임되었다. 미 육군 1군 사령관 조지 S.패튼의 휘하에 배속됐는데 루르 포위전에서 공을 세워 저돌적인 맹장 패튼이 자기 부하 장군 중 가장 뛰어나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고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 8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무지막지한 물량공세에 맞서기 위해 밴 플리트 탄약량(Van Fleet Day of Fire)이라는 전술을 창안하기도 했다. 바로 포병의 탄약통제보급율(CSR)을 5배로 늘려 이른바 무제한 사격이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105mm 포는 300발, 155mm 포는 250발, 203mm 포는 200발, 175mm 포는 250발을 쏘며 중공군의 사상률을 높인 덕분에 중공군의 공세는 좌절되었다. 한국군의 화력덕후 기질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